판타지 소설의 옥석 가리기
  • 이성욱(문화 평론가) ()
  • 승인 1999.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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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비평

누구는 대중 목용탕의 뜨거운 탕 속에 몸이 잠겨 있을 때, 어떤 사람은 차가운 소주가 식도 벽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싸-하고 들 때 충일한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실내는 연탄 난로의 따뜻함으로 적당히 데워져 있고, 난로 위 양푼에는 오뎅이라 부르는 어묵이 훈훈한  김속에 묻혀 있고, 가슴 주머니에는 금방 뜯은 담뱃갑이 얌전히 들어 있고, 의자에는 세상에거 가장 게으른 자세를 일부러 찾아낸 듯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이 얹혀 있고 등등. 낯 익은 풍정이 아닌가? 이 실내 풍경화의 화룡점정은 그 의자에 TKg여 있는 몇권의 무협지이다. 황당과 허황 등으로 일관된스토리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무협지는 사람들에게 환상과 대리 만족, 가상 체험등을 통한 일순의 재미와 쾌감을 공급해 주었다.

 비록 일상의 삼엄함에 비하자면 한줌의 재미 정도에 그치는 것이기는 했지만 한국인들은 그 무협지 서사를 통해 글읽기의 짜릿함을 경험해 왔다. 하지만 무협지는 ‘킬링 타임용’ 이라는 정해진 역할 이상을 넘어가 보지 못했다. 언제나 순문학의 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동원된 엑스트라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정황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각별한 의미를 발결하게 된다. 소설에는 순문학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의 성골 계보에는 들지 못하는 잡골(雜骨)이기는 해도 소설의 또 다른 면모를 맛보여주는 SF·추리물·판타지 소설이라는 장르도 있다. SF나 추리물을 만만하게 보는 이도 많다. 그러나 추리물은 머리 게임이며, 순수한 논리 게임이다. 삼단논법도 제재로 통하지 않는, 그런 만큼 논리적 사유와는 애당초 담을 쌓은 사회토양에 추리물은 파종될 수 없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그럴듯한SF·추리물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잡골 장르를 만만하게 보는 우리가 괜히 열없어진다.

 순문학이 포괄하지 못하는 각별한 상상력의 세계를 재산으로 삼는 것이 잡골 장르의 특장인 반면 우리는 그런 것을 만들고 읽어 본 경험이 별로 없다. 다만 그 부재의 틈을 대개 무협지로 매워 온 것이다. 무협지 또한 잡골 장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작품들의 수준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 무협지의 역할,다시 말해 거의 유일한 잡골 장르기능이 근년에는 이른바 판타지 소설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판타지 소설이라 이름 붙은 글들이 때아닌 소설계 벤처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고, 목하  신문에는 한 면 전체가 판타지 소설광고로 도배되기도 하는 국면을 보면 넉넉히 짐작 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순문학 애호자들은 심기가 불편해진다. 문학의 후광이 점차 빛을 잃어가는 시절을 틈타 그런 잡스러운 소설이 소설문학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타지 문학의 성행하는 앞에서 문학 관련자들은 그런 지청구만 늘어놓을 일이 아니다. 판타지 소설이 주목을 끄는 까닭을 숙고해 보는 것이 오히려 참된 문학적 사고이다.

독자가 외면하는 순문학,엄숙한 부동 자세 풀어야
 무협지에도 옥석이 있듯이 판타지 소설에도 그렇다. 하지만 사실 근자에 나온 판타지 소설들을 읽어 보면, 판타지 소설을 은근히 응원해 온 나로 서도 실망감을 감출 수 없거니와 판타지 소설에 대한 비판이 일견 이해되기도 한다. 판타지 소설의 주특기는 어떤 틀에 묶이지 않는 상상력의 자유로운 확산과 변이이다. 둑자는 그런 확산과 변이를 통해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감각과 세계상을 접속해 보면서, 그를 통해 현실 속의 사고와 감각을 되새겨 볼 기회를 얻는다.

 그런데 근래의 판타지 소설은 판타지 소설다움과는 별 인연이 없는 듯이 보인다. 열에 아홉이 상투적인 구성과 상상력에 기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 문학도 판타지 소설을 포괄할 수 있는 유연한 체질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공소하게 들리기 딱 맞춤할 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문학은 시절이 그리해서이기도 하지만, 대개 엄숙함과 부동 자세로 일관해 욌다. 그러나 이제 그 부동 자세를 조금씩 풀 필요가 있다. 판타지 소설이 성행하는 것은 부동 자세형 순문학을 무서워하는 새로운 서대가 대안으로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의 특장에 값하는 물건이 나와 스스로를 증거할 수 있을 때 순문학도 ‘ 변심’할 수 있다. 작가든 독자든 판타지 문학을 쉽게 생각하는 한 그 변심을 요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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