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보내며/극단의 시대여 안녕!
  • 김상익<시사저널>편집장 직무대행 ()
  • 승인 1999.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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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20세기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영국의 원로 역사학자 에릭 흡스봄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소련이 붕괴한 1991년까지의 역사르 frl술하고 책이름을<극단의 시대:20세기 역사>라고 붙였다. 지나온 100년 동안 인류가 극단에서 극단을 달려왔다는 뜻일까?

 과연, 이 책의 앞머리에 실린 20세기에 대한 지식인 열두 사람의 논평은 극단적이다. 예를 들어 그 극단의 한쪽은 이렇다. 영국의 철학자 아이제이어 벌린은 “20세기는 서양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세기로밖에 기억되지 않는다”라고 단정 한다. <파리 대왕>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윌리엄 골딩도 다르지 않다.“나는20세기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폭력적인 세기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말처럼 20세기는 전세계가 처참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비극으로 시작되었으며, 21세기를 앞둔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는 학살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인류의 평화 의지를 꽁꽁 얼게 만들었던 내정이 50년 가까이 계속되었고, 정치적 암살이 꼬리를 물었다. 제 3세계에서는 정통성 없는 군사 독재 권력에 의한 고문이 수십 년간 버젓이 자행되었다.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이 시대가 낳은 가장 끔찍한 말을 꼽는다면 ‘홀로코스트’와 ‘인종 청소’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있다, 스탈린 시대의 저 악명높은 숙청과 강제 수용소...... 이 추악한 20세기의 얼굴 뒤에 인류의 구원과 해방과 형제애를 부르짖으며 만들어낸 종교와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은 20세기의 아이러니일까?

 ‘전쟁과 폭력의 시대’가 그려낸 희망의 자화상‘
 그러나 지난 100년에 대해 붉은 피로 물든 잔인한 시대였다고 단정할 수많은 없다. 에릭 홉스봄 역시 그의 책에서 20세기가 이룩한 희망의 증거를 외면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노벨상을 수상한 이탈리아 과학자 리타 레비 몬탈치니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는 더 나은 것을 위한 혁명들이 일어났고... 여성들이 수세기의 억압에서 벗어났다.”

 20세기의 두 번째 모습은 혁명의 열정이 솟구치고 생동감이 넘쳐 흐르는 ‘인간의 얼굴’이다. 60년대의 반전운동과 민권운동 그리고 여성해방운동 역시 이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이 마땅하다.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되어 중국과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해 지구촌 곳곳으로 번져간 사회주의혁명은, 비록 그것이 실패로 끝났다고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너무도 인간적인 몸짓 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또한 아리러니하게도, 자본주의 앞에 무릎을 꿇은 사회주의야말로 오늘날 자본주의가 황금 시대를 누릴 수 있도록 ‘자기 개혁’을 추동시킨 자극제였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현실적으로도 ‘대안’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주의 는 자본주의를 강화시켜 주었던 것이다.

 20세기의 세 번째 얼굴은 아마도 과학 기술의 발전일 것이다. 19세기까지 절대 진리라고 여겨졌던 뉴턴의 고전 물리학이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에 의해 무너진 이후 과학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비록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핵폭탄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과학이야말로 20세기를 인간 비극의 시대가 아니라 인류 진보의 시대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세 얼굴을 가진 극단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20세기에 익숙해 이TSms 우리 모두가 2000년 1월1일을 기해  ‘21세기 인간’으로 불리겠지만, 삶의 양태가 어느날 갑자기 바뀔리는 만무하다. 또한 그것이 절망이었든, 희망이었든, 새로운 가능성이어TEms, 20세기가 남긴 유산은 21세기로 이월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100년 뒤 역사가들은 그들의 시대를 뭐라고 규정할까.

 극단의 시대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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