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에 내몰린 삶“가자 농촌으로”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8.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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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자 대상‘귀농 프로그램’문전 성시

국내 재벌 기업 계열사인 ㅎ건설 영업이사 김천수씨(46) 올해 꿈은 농촌에서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지난 17년간 서울에서 회사 인간으로 잔뼈가 굵은 김씨가 귀농에 관심을 둔 대는 지난해 5월이었다. 장기적인 건설 경기 불황 여파로 30여 임직원이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될 때, 김씨는 그간의 업무 실적을 인정받아 가까스로 감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은 데 안도하는 대신 이때부터 ‘준비된 귀농’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김씨가 농업을 유망한 창업분야로 보게 된 데는 지난해 7월 정부가 밝힌 도시민 귀농자 지원방침의 영향이 컸다. 정부는 농어촌 구조 개선사업 내용에 도시 실직자들이 귀농할 경우 농지 구입 우선순위 및 영농자금 지원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김씨는 회사에 출근하면서 틈나는 대로 농업관련 서적을 뒤적이고, 9월에는 모아둔 돈으로 새끼 사슴 20마리를 사서 경기도 안성에 잇는 친구의 농장에 위탁 사육시켰다. 또 11월에는 농촌진흥청이 실시한 귀농자 교육에도 참가해 워밍업을 시작했다. 당초 올 한해 더 준비할 계획이었지만 IMF 한파가 갑자기 몰아닥치자 김씨는 지난 12월 말 자진해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김씨는 현재 퇴직금을 들고 경기도 안성 일대의 절대 농지를 구입하러 다니고 있다.

“작년 하반기 이후 3천가구 귀농”추산
 IMF 시대에 몰아친 감원 한파로 지난해 12월 말 부서가 없어지면서 해고된 한 보험회사 대출과장 신재만씨(38)도 요즘 귀농을 꿈꾸고 있다. 그간 저축한 돈과 퇴직금을 합쳐 1억2천만원가량 손에 쥔 신씨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도시에서 버티려 하다가는 원금마저 가먹고 말리라는 점이었다. 농업에 전혀 관심도 경험도 없는 신씨였지만 IMF 파고를 넘는 길은, 소비 지출이 도시보다 적은 농촌으로 들어가 소규모 자급 영농을 하며 암중모색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다니는 두자녀의 교육문제를 내세운 아내의 반대가 만만치 않아 결국 김씨는 서울에서 2시간 이내 거리에 있는 농촌 부락 빈집을 찾기로 했다.

 국가 부도 위기를 맞아 도시 실직자들이 급장하면서 농촌을 새로운 정착지로 꿈꾸는 도시민이 늘어나고 있다. 농림부에 따르면, 90년 이후 7천여 가구가 농촌으로 돌아갔는데, 그중 최근2년 동안의 귀농자가 5천여 가구에 달한다. 아직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지난해 하반기 이후에만 해도 3천여 가구가 도시를 떠났을 것으로 잠정 추산한다. 최근 경상북도가 오는 2월중 20~30명의 분양자를 선정하기로 하고 신청접수에 들어간 구미화훼농장 분양 공모에 서울 · 대구 등지에서 무려 1천1백여 명이 문을 두드렸다.

 앞으로 닥칠 대량 해고 사태를 앞두고 귀농 희망자들이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자, 실업자 전직 훈련을 담당하는 노동부 고용보험 관련 창구도 바빠졌다. 노동부 능력개발과의 한 관계자는 “대량 실업이 몰고 올 귀농 인구를 구가 인력 계획 범주에 넣고 곧 실직자 천~2천명을 대상으로 한 귀농자 전업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위해 농림부와 협의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도시 실직자들에게 귀농이 성공적인 새 삶을 보장하리라는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IMF 시대의 여파가 농업분야까지 몰아닥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 늘어나는 귀농 희망자들은 농업에 희망을 품고 충분히 사전 준비를 했다기보다는 도시 산업체에서 떠밀려 막연히‘농촌으로 가서라도 버티자’는 식의 실망 귀농자가 많다. 그동안 귀농 희망자에게 준비 교육을 해온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정신무장 부재 귀농’이다.

 현재 귀농 희망자에게 사전 교육을 하고 있는 곳은 전국귀농운동본부(02-3141-4417)와 농촌진흥청 기술연수과(031-292-4259), 그리고 농협 안성교육원(0333-53-2541)등이다. 농협측은 지난해 말 이후 실직한 귀농 희망자들을 2월부터 곧바로 교육하기로 하고 현재 교육생을 모집하고 있다(아래 상자 기사참조).

 96년부터 환경 농업을 기치로 내걸고 귀농학교를 운영해 그동안 교육생 2백여 명을 배출한 전국 귀농운동본부는, 올해 교육 목표를 ‘IMF 시대 실직자들에 대한 기존 사고방식 각성과 새로운 삶의 가치관에 입각한 조직적 귀농’으로 잡고 있다. 귀농운동본부는 이미 전북 무주와 충남 홍성, 충북 괴산 등에 각각 다섯 가구 안팎의 조직적 귀농을 성사시켜 무공해 생태 농업을 실험하고 있다. 올해에는 3월 · 8월 · 10월 세 차례에 걸쳐 귀농학교를 열 계획이다.

귀농자 실패 막을 정부의 배려 필요
 지난해부터 전국 각 시군 단위 농촌지도소에 귀농상담실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는 농촌진흥청 역시 올해 귀농희망자가 급격히 늘 것으로 보고 교육과정을 늘렸다. 오는 2월9일부터 실시하는 귀농교육은 지난해 말 넘쳐난 도시 실직자들로 이미 접수가 마감되었는데 교육생이 8백31명이나 된다. 오는 9월2차 교육을 실시할 예정인 농진청의 귀농 교육은 주로 유망한 영농 분야 정보와 기술 습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일찍부터 준비한 귀농이든, 갑자기 실직해 일단 농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로 한 경우이든, 도시민 귀농자 증가는 필할 수 없는 IMF 시대의 한국 사회 풍속도로 자리 잡을 것 같다. 따라서 이들이 또다시 농촌에서 실패해 이중의 상처를 입지 않도록, 정부는 실업 대책의 하나로 귀농자들에 대한 배려를 빠뜨려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丁壹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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