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 김정원(한국 국제 교류재단 이사장) ()
  • 승인 1998.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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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국제통화기금의 운영에 깊이 관여한 것이 알려져‘미국=IMF’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이 때문에 한국 언론에서 미국은‘경제 제국주의 화신’으로, 때로는‘경제우방’으로 묘사되었다. 미국에서 대학 교수와 변호사로 일하면서 미국 사회를 피부로 체험한 필자는 이 협상 과정과 대처 자세를 지켜보면서 시종일관 조마조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미국인들은 업무나 협상과정에서 원칙을 내세워 세부상황까지 꼬치꼬치 따지기를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기행동에 대한 의도와 방침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약속에 따라 공정하게 일을 진행한다는 확신이 서면, 상대방을 신뢰하는 성향도 강하다. 한마디로 대단히 이성적이다. 반면 우리 국민은 원칙보다는 관례와‘감’을, 솔직함보다는 체면과 위신을 중요하게 여긴다. 일을 순차적으로 하기보다는 단숨에 빨리 처리하는 것을 좋아해서 고속 성장 신화를 남겼다. 잘라 말하면 다분히 감성적이다.

 이렇게 성향이 다른 협상 대표들이 한국 금융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해 마주앉고 보니, 협상 당사자들과 지켜보는 국민들은 서로에게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국제통화기금 처지에서 보면, 국가의 외환 보유고가 완전히 바닥나기 일보 직전에야 도움을 요청한 것, 부실 종금사 처리와 구조조정을 미룬 것, 외환 보유고를 허위로 발표한 것이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였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국가 부도가 코앞에 닥쳤는데, 이것저것 캐묻고 문제점만 지적하면서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상대방이 야속하게 느껴질 만하다.

IMF가 남긴 네 가지 숙제
 문제는 세계가 단일 경제권으로 통합되어 가고, 수출 · 수입이 개별 국가의 동맥과 정맥이 되고부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동남아나 일본이나 미국의 경기가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제 세계화는 절체절명의 추세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좌절의 상당부분은 세계11위 경제 대국이라는 몸집에 걸맞는 체제를 제때 갖추지 못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 하루하루 다가오는 부채상환을 앞두고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여느 서방 국가에 뒤지지 않는 합리적인 법과 규칙을 체화해야 한다. 다음 사항들을 본격적으로 실행한다면‘기회’에 더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최대 관건인 대외 신인도를 회복하기 이전에 대내 신인도를 먼저 쌓아야 한다. 국민들이 정부의 공식 발표를 믿지 못하고, 정부가 스스로 약속한 정책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대외 신인도 확보는 요원하다. 지금 김대중 차기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부가 발표하는 크고 작은 시책들은 국민은 물론 전 세계에 공개되는 만큼 신중함과 일관성을 견지해야 한다.   둘째, 정부와 기업은 국가와 기업 경영에 투명성을 보여야 한다. IBM · 코카콜라 같은 거대 기업의 회계보고서는 규모가 방대하지만, 소액투자자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다. 우리의 경우에는, 국가나 기업운영이 투명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내부적인 묵계에 의해, 자산 · 영업 실적 · 회계 처리의 상당 부분이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고 있다. 경영의 투명성은 조직의 앞날을 예측 가능하게 한다. 또한 등을 돌린 해외 투자가들을 되돌아오게 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셋째, 정부는‘이제 해결됐다’‘무사히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12월에 겪은 1,2차 국가 부도 위기를 국제통화기금 등에서 외채를 들여옴으로써 간신히 모면했다. 그러나 이 돈은 또 다른 부채일 뿐이다. 우리가 못 갚으면 우리 후손이 갚아야 할 빚을 얻어 놓고는‘해결됐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넷째, 정부는 대외 협상에서 원칙을 지키고 협상 창구를 단일화해야 한다. 미국 윌 스트리트의 금윰전문가들은 수시로 바뀌는 한국 대표들을 대하면서 누가 진짜 한국 대표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말을 자주한다. 협상 성공의 밑거름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이다. 사흘이 멀다하고 협상자가 바뀐다면 협상의 내용과 질이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협상 전략이 체계적이지 못한 것도 문제다. 하루속히 영역별 전문 협상단을 발족하여 상대방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몸을 싣고 있는 한국호는 지금 격랑에 휘둘리고 있다. 협상과 불안과 긴장이라는 파고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힘든 고비를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닌 감성과 구미 사회가 지닌 이성도 어렵사리 녹아들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분노하고 책임을 물어야할 대상은 미국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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