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 주의! 파리 뒷골목의 절망
  • 송준 기자 ()
  • 승인 1997.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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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유 카소비츠 감독 <증오>/출구 없는 청춘의 분노 그린 ‘프랑스판 나쁜 영화’

무서운 신예가 나타났다. 마티유 카소비츠, 프랑스 영화 감독, 67년생, 헝가리 출신 이민 2세. 카소비츠감독은 두 번째 장편 <증오>로 95년 칸 영화제에서 일약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카소비츠 감독을 ‘21세기 시네아스트’ 반열에 올린 흑백 필름 <증오>는 비평의 반론마저 잠재웠다. 그 <증오>가 한국에 왔다.

 <증오>는 카소비츠식 ‘나쁜영화’다. 방리유에사는 ‘나쁜 아이들’ 셋의 24시간이 영화에 담겼다. 방리유는 파리의 하수구에 해당하는 위성 도시다. 전락한 파리지앵과 아랍인·아프리카인 들이 인종 차별·소외·범죄·폭력에 범벅이 되어 살아간다. 카메라는 암울한 방리유의 거리를 훑으면서 세 젊은이의 일상으로 스며든다.

 유태계 프랑스인 빈츠와 아랍인 사이드, 흑인 위베르는 단짝 친구 사이다. 미래를 꿈꾸어 보지만 짜증과 혼돈과 분노가 뒤엉킨 이들의 삶에는 비상구가 없다. 시위와 진압이 반복·증폭되면서 계엄이 선포되고, 어느날 16세 아랍 소년 압델이 경찰에 고문당해 혼수 상태에 빠진다. 소년 압델의 혼절과 죽음을 전후하여, 카메라는 숨 돌릴 겨를 없이 세 친구의 뒤를 쫓는다.

 아찔한 브레이크 댄스, 마약·폭력·무질서, 충동과 방황…, 영화의 호흡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마침내 권총을 빼든 빈츠의 격정과 동반하여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뮤직 비디오를 연상케 하는 빠르고 격렬한 화면, 랩·레게·샹송이 뒤섞인 격동적인 사운드, 카소비츠는 일단 영상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3차원을 자유자재로 누비는 카메라워크는 절묘한 조명·사운드와 어우러져 긴장과 전율을 차근차근 고조시킨다.

 그러나 카소비츠의 진면목은 이 현란함에 있지않다. 영화 <증오>의 진가는 내용과 형식미의 조화에 있다. 주인공의 감정과 영상의 호흡이 함께 달리며, 영화의 골격을 형성해 간다. 감독은 치밀하게 영화의 척추를 건설했고, 카메라·조명·사운드·효과 등이 군살 없이 어울리며 방리유의 ‘증오’의 전말을 관객에게 전한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인용되는, 고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비유는 음미할 만하다. “아직까진 괜찮아, 아직까진 괜찮아….”이에 대해 위베르는 중얼거린다. “아직 괜찮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어떻게 착륙하느냐지.”

 착륙이 불안한 아이들을 다루면서 영화 <증오>는 가뿐하게 착륙했다. 여기에 카소비츠의 진면목이 숨어 있다. 영화를 곡예하듯 아슬아슬하게 몰다가 관객의 가슴에 사뿐히 착륙시키는 감독, ‘나쁜 아이들’을 다룬 두 영화 <증오>와 <나쁜 영화>는 착륙의 관점에서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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