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투자가들은 절망한다”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7.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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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증권사 임원들 증언 /“한국 투자 매력 상실하자 발 빼려 안간힘”

동방페레그린 증권 이남우 이사는 ‘미스터 페시미스트’라는 별명답게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비관적이다. 석달 전 환율이 9백5를 턱걸이하고 있을 때, 연말에 9백60 선까지 급등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런 그도 최근 미국을 방문해 미국인 투자가들이 한국 경제에 대해 느끼고 있는 ‘절망감’앞에서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지금 넋이 나가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아시아 각국에 분산 투자하는 것이 보통인데, 불과 3~4개원 만에 환율이 30~40%나 절하되고 주가도 30~40% 폭락하자 거덜난 투자가들이 수두룩하게 생겨난 것이다. 상황은 아시아 외환 위기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헤지 펀드들도 마찬가지여서, 원금을 까먹고 문닫은 곳이 부지기수이다.

“한국 · 태국 등 ‘정치 지도력 부재’ 닮았다”
  미국인 투자가들에게 한국 경제의 실상을 알리고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출장을 떠났던 이이사는 심한 충격만 받고 소득 없이 돌아왔다. 유럽 국가들을 방문하려던 계획은 아예 취소했다. 유럽의 투자가들은 한국 경제에 훨씬 더 비관적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던 한국은 외국인 투자가들에게 투자처로서의 매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 것이다.

 지금 이들의 관심은 한결같이 어떻게 하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느냐는 것뿐이다. 소로스 펀드나 타니거 펀드 등 일부 헤지 펀드들이 한국의 환율 급등을 이용해 호주 둥지에서 단기 차익을 노리고 투자하는 것이 고작이고, 대부분의 투자가들은 한시라도 빨리 아시아에서 발을 빼려고 한다.

 현재 환율 인상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미국 경제가 6년 연속 호황을 누리자 세계 각국 화폐가 평가 절하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제일 심한 곳이 바로 거품 경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아시아이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연초부터 발생한 대기업 연쇄 부도로 금융기관 부실화가 가속화했고, 때마침 불어닥친 동남아 외환 태풍으로 인해 경제 전체가 기우뚱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한국이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외국인 투자가 들에게 그 말이 먹혀들 리 만무하다. 뉴욕 외환 시장에서 한국산업은행이 발행한 채권이 태국 것과 함께 위험한 것으로 취급받는 것이 단적으로 그것을 설명한다. 정부는 기업과 금융기관이 줄줄이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산업은행을 통해 차입을 확대하고 있는데, 외국 투자가들이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돈이 부도 날 것이 뻔한 기업과 금융기관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단기적으로 한국의 장래에 대해서도 그리 낙관하지 않ㄴ느다. 국내 연구소들은 내년도 경제 성장률을 5~6% 잡고 있지만, 외국인 투자가들은 기껏해야 3%, 그렇지 않으면 제자리 성장까지 내다본다. 최근 대기업들이 내년도 투자 계획을 발표했지만, 이것도 제대로 이행되기 힘들 것으로 본다. 심각한 불황으로 인해 기업인들의 투자 마인드가 위축되어 있고, 투자에 필요한 자금 도입도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년에는 기업체들이 본격적으로 감원을 시작할 것이고, 부동산 가격이 침체하고 소비가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돌파구가 있다면 수출뿐인데, 기업들의 채산성이 극도로 악화한 상황에서 수출이 한국경제를 수렁에서 건져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적잖은 의심을 품고 있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경제가 이처럼 난리인데도 한국 국민들은 물론이고 정부 관료들조차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한국은 동남아 국가들과 다르다’는 것이 정부의 일관된 주장이지만, 외국인 투자가들은 한국을 특별히 달리 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대통령이 ‘세일즈맨으로 나서고 잇는 마당에, 한국만 유독 태평하게 권력 다툼에 매달리고 있는 것도 이들에게는 의문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미국계 증권사 관계자는 “가장 심각한 외환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태국·인도네시아는 ’지도력 부재‘라는 점에서 닮았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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