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의 대하 드라마 해피 엔딩 보고 싶다
  • 강준만 (전북대 교수. 신문방송학) ()
  • 승인 1998.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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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 계급 · 지역 갈등 해소할 ‘절호의 기회’

 김대중을 하나의 이론으로 묶어내어 설명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김대중은 드라마다. 그것도 대하 드라마다. 역사가 얽혀 있고 구조가 내제되어 있다. 분단, 계급. 그리고 지역 문제까지 녹아 있다. 어느 한편에 한과 집념이 서려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냉소와 증오가 떠오른다.

 “전두환이가 참마로 잘하기는 다 잘했는데 딱 한 가지는 잘 못한기 있다 아이가.”

 “먼데?”

 “김대중이 안 죽이고 놔둔거, 그거 잘못한 거 아이가 이 말이라.”

 대구 출신인 유시민씨는 그의 저서 <97대선, 게임의 법칙>에서 87년 대선 기간에 자신이 대구의 한 골목 시장에서 목격한 풍경을 그렇게 전했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사는 40대 후반 회사원 한 사람은 나의 책 <김대중 죽이기>를 읽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다.

 ‘87년 대선에서 YS가 DJ 때문에 떨어졌다는 지역 여론 때문인지 내가 다니는 부산 성당에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성당의 중고등부 학생들이 세태 풍자 연극을 준비했는데 내용인즉 DJ와 KAL기 폭파범인 마유미가 끌려나와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내용이 성당안에서 버젓이 받아들여지는 현실이 섬뜩할 지경이었다. 나는 그 즉시 중고등부 교사에게 엄중 항의하였지만 나만 이상한 사람으로 몰렸다.’

 대선 후유증을 치료하겠다는 취지로 모든 대중 매체가 총동원되어 ‘국민 화합’을 부르짖는 마당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꾸짖을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김대중에 대해 진실을 이야기하겠다면 그것을 빼놓고 갈 수는 없다.

“정권 성공해야 호남 몰표 정당화”
 생각해 보자.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김대중은 6년간 감옥 생활을 했으며, 10년간 연금·망명 생활을 했다.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으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이유는 단 하나.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헌신의 결과로 그는 다리를 절고 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흉이 된다. 지난 대선 기간에 한나라당 김호일 의원은 경남 함안에서 지원 유세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걸음 걷는 것 보면 좌우지간에 말이지. (행동으로 절뚝이는 흉내를 냄) 그런데 부전자전이라든가 아들은 더 절뚝거린다…(다시 절뚝 흉내) 부자지간에 절뚝거리고 다니면 이주일아하고 연예인들은 다 굶어 죽는다.”

 선거도 다 끝났는데 왜 자구 그런 이야기를 들추어 내냐고 또 나를 나무랄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참으로 이상하지 아니한가? 이 나라의 어떤 국민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그렇게까지 증오한 적이 있는가? 김대중을 그렇게까지 증오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지금 기대중을 맹목적으로 증오하는 일부 영남인들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언론 매체도 공개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사석에서는 가장 큰 이야깃거리 중의 하나로 거론되는 그 무시무시한(?) 호남 몰표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김대중 증오의 이면에는 무서운 호남 차별 심리가 도사리고 있다. 호남 몰표를 이해할 수 없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은, 개탄하기 이전에 김대중에 대한 증오를 이해할 수 잇는지 자문자답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결국 지도력으로 승부를 내야 한다. 지도자 선택을 놓고 아무리 이론적으로 논쟁해 보아야 답이 나온지 않는다. 호남 몰표의 정당성 여부는 결국 김대중 정권의 성공 여부에 달린 것이다.

 김대중 후보 당선은 정권 교체를 염원하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감격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호래 감격하고 앉아 잇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냉혹한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은 부도 위기에 몰려 있다. 부도 난 주식회사의 최고 경영자로 뽑힌 사람에게는 축하와 찬사보다 격려와 고언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언론에 끌려다니지 말라”
 김대중 정권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어떤 정권이든 성공적인 업적을 남기는 것이 국가를 위해 좋은 일이겠지만, 김대중 정권의 경우 반드시 크게 성공해야 할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우선 그동안 민주화와 정권 교체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흘린 피땀은 김대중 정권이 성공해야만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김영삼 정권은 박정희를 부활시키는 과오를 저질렀다. 그런 과오가 저질러진 마당에서 선거를 치러야 했던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를 껴안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를 다시 무덤에서 편히 쉬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또한 호남인들이 김대중 후보에게 던진 그 무시무시한 몰표가 지역 감정이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슬기와 용기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김대중 정권이 보여주어야 한다. 호남인들 역시 자신들의 그러한 선택에 책임을 지는 자세로 위기 극복에 임해야 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김대중 당선자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김대중 정권은 성공해야 한다. 그가 대통령 직에 보인 그 강한 집념은 그가 ‘대통령 병 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더 대통령 직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국가에 대한 사랑이 강했기 때문임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 정권은 성공할 수 있는 몇 가지 조건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로 그야말로 공정한 경쟁을 통해 탄생한 정권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아니 일부 유력 언론의 불공정 보도와 이른바 ‘북풍’까지 감안한다면, 김대중 후보는 불리한 조건에 승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김대중 정권은 92년 대선에서 3당 합당이라는 ‘원죄’를 안고 태어난 김영삼 정권과 달리 모든 위선과 기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김대중 정권은 이 좋은 정치적 기득권 세력을 비호하는 언론에 끌려다니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뢰 없이는 개혁 이룰 수 없다”
 김대중 당선자의 개인적 자질과 역량도 빼놓을 수 없다. 김대중 정권은 누구에게 업혀서 태어난 정권도 아니며, 권력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머리를 빌려 운영될 정권도 아니다. 김대중 당선자가 오랜 세월 정치판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하는 점도 정치권의 화합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은 동시에 그의 약점이기도 하다.

 ‘3김 정치를 청산하자’는 주장은 다소 왜곡된 것이기는 하나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 한국 정치의 주도권이 김대중 당선자에게 넘어간 이상 야당 시절의 구태의연한 정치 형태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 그야말로 ‘깨끗한 정치’의 청사진을 밝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김당선자가 자신의 진실성을 모든 국민에게 납득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대통령이 되기 위한 김당선자의 그 무서운 집념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그는 한국 정치의 파행과 낙후성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점을 한 번도 공개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고, 물론 사과한 적도 없다. 그래서 안된다. 이제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면서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김종필씨와의 약속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김영삼 정권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신뢰를 까부수고 이룰 수 있는 개혁이란 없다. 내각제 개헌은 국민이 판단할 문제다. 신뢰에 근거한 성실한 대화와 타협, 그것만이 지금 우리가 처한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최대의 무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민은 파란만장한 ‘김대중 드라마’의 해피앤딩을 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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