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대로 해고’판치자 노동계 들끊는다
  • 문정우 기자 (mjw21@sisapress.com)
  • 승인 1998.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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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렁한 법이 사용자‘부당행위’부채질

 경제위기가 한국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다. 물가상승률까지 감안하면 1인당 국민소득은 이미 10년 전 수준으로 후퇴했다는 연구 보고도 나왔다. 어느 사이엔가 부잣집 아이들만 유치원에 다니는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다. 음식점에서 다른 사람의 새 구두를 훔쳐가고, 공중전화 동전함을 터는 60,70년대식 좀도둑이 횡행한다.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노동 현장도 예외가 아니다. 개발 독재 시대에나 통용되었던 부당 노동 행위가 판을 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생산직 노동자분만 아니라 모든 계층 노동자가 고통을 분담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각 사업장에서 노동법은 안 지켜도 그만인 법으로 다시 전락하고 있다.

 노동법이 얼마나 지켜지지 않는지 알기 위해서 노동현장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조차 없다. 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요즘 많을 때는  하루 만명꼴로 실업자가 거리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언론에는 매일같이 어느 어느 기업이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천명을 감원했다는 기사가 실린다.

사용자들, 해고 회피 노력 거의 안해
 새 노동법이 공표된 것은 지난 2월20일. 이 노동법에 따르면, 경영상 급박한 필요에 의해 일정 규모 이상의 노동자를 해고하려면 기업은 해고하기 30일 전에 노동부에 자세한 내용을 신고해야한다. 그렇다면 새 노동법 공표 당일 노동부에 신고한 기업이라도 3월20일 이후에나 대규모 감원을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 노동법 개정 이후부터 3월20일 전까지 노동자를 해고한 기업은 대부분 불법행위를 저지른 셈이다. 정리해고 조항을 2년간 유보한 구 노동법이 엄존했던 지난 연말 연초 노동자를 무더기로 감원한 기업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왜 이 같은 무법천지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일까. 부분적으로는 새 정부가 김종필 총리서리 인준의 덫에 걸려 출범 초부터 정쟁에 휘말린 탓이다. 행정 공백이 의외로 길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업주들이 IMF위기와 새 정부 출범 혼란기에 편승해 대량 해고를 재빠르게‘해치우고’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분위기에 떠밀려 불법해고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부당 노동행위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잇는 사업장은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지만,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이 무너져 일대 혼란에 빠져 있다.

 하지만 개정 노동법이 경영상의 긴박한 이유에 의한 해고를 허용했다고 해서 과거보다 사용자가 노동자를 해고하기 훨씬 쉬워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사용자가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요건과 절차는 전보다 더 까다로워졌다.

 개정법에서는, 사용자가 노동자를 해고하려면‘해고 회피노력→ 합리적이고 공정한 해고 기준마련→ 해고 60일전 해고 회피방안 및 해고기준을 근로자 대표에게 통보하고 성실한 협의→ 해고 30일전 해고 당사자에게 통보→ 일정 규모 이상 해고시 30일 전 노동부장관에게 신고’라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판례에 다르면, 위의 절차 중 노동부장관에게 신고해야 한다는 조항을 제외한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길 경우에는 대부분 부당 노동 행위 판정이 내려진다.

 한국노총 고발센터에 신고된 해고 유형을 보면 일괄 사표후 선별수리(35%), 예고없는 즉시 해고(26.5%), 부서할당 방식 해고(10.2%)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모두 불법 해고이다.

 해고 회피 방안과 합리적이고 공정한 해고 기준은 각 사업장의 사정이 다르므로 노사가 자율적으로 협의해 결정해야 할 사항이지만, 그동안 누적된 판례에 의해 그 개념은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다. 법원이 그동안 해고 회피 노력이라고 인정한 사례는 연장 근로축소, 근로시간 및 임금 감축, 신규채용중지, 임시직 등의 재계약 정지, 배치전환 및 사외파견, 일시휴업(휴직), 퇴직희망자 모집등이다.

 최근 일부 기업은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해고 회피노력을 다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임금 삭감은 여러 가지 해고 회피 노력 중 하나일 뿐이다. 법원은 기업이 가능한 모든 조처를 취하지 않는 경우에는 해고 회피 노력을 다했다고 인정하지 않는 추세이다.

 해고 대상자를 선정할 때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 기업들 대부분이 인사고과제를 공정하게 실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하지만 법원이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이라고 인정한 사례와 인정하지 않은 사례를 살펴보면 큰 원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해고요건 어겨도 사용자 처벌 어려워
 일용 근로자 우선해고, 근무 성적 불량 및 상벌기준, 사업부 폐지에 따른 전원 정리, 근속 기간이 짧은 순서등이 법원이 인정한 사례이다. 반면 장기 근속자 우선해고, 단체 협약 위반, 조직 개편과 관계없는 전직종 근로자 대상, 정년이 가깝다고 해고한 경우는 법원이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은 대체로 근무 성적에 문제가 없다면 가정경제의 부담이 큰 노동자 순으로 해고 대상에서 제외해야한다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개정법에서 성차별 금지조항을 아예 명문화했기 때문에 여성이 우선해고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고 보면 현재 대부분의 기업이 고임금 · 경력자 · 여성 순서로 해고하는 행위는 분명히 법원이 정한 원칙에 어긋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해고 요건이 까다롭고 판례가 누적되어 있기 때문에 합법적인 해고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기업들이 식은 죽 먹듯이 해고하고 있는 까닭은, 법에 물렁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현행법은 정리 해고 요건과 절차는 강화했지만, 그것을 위반하면 어떻게 처벌하겠다는 조항은 두지 않았다. 사용자가 노동자를 멋대로 해고해도 당장 법의 제재를 받을 일은 없다는 얘기이다. 노동자는 불법 해고를 당하더라도 공권력의 보호를 받을 수 없고, 개인적으로 법정 투쟁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해고당한 노동자가 구제받으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지방노동위원회에 제소해 행정소송을 하거나, 법원에 해고 무효 확인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정 소송은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기업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해고 무효 확인소송을 제기할 경우 3심까지 가려면 대개 3년이 걸린다. 비용도 천만원 정도는 부담할 각오를 해야 한다. 여간 독한 마음을 먹기 전에는 법정 투쟁을 하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을 뻔히 아는 사용자가 까다로운 법 절차를 지키면서 노동자와 성실히 협의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고용상황이 악화하자 노동 현장의 분위기는 점차험악해 가고 있다. 지난 3월5일에는 창원산업 단지내 공작기계 생산업체 노동자인 오길원씨가 해고와 다름없는 부서 전환 배치 발령을 받고 분신 자살했다. 지난 2월13일 대우중공업 옥포조선소 노동자 최대림씨에 이어 올해 들어 벌써 두 번째 일어난 노동자 분신이다. 노동 현장의 시계는 오나벽하게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 대회의실에는‘노동자는 다 죽고 회사는 망해도 사장 놈은 잘 사는 이 나라가 싫다.… 빼앗긴 생존권을 되찾자’는 섬뜩한 구호가 나붙은지 오래이다.

 3월6일 민주노총 산하 전국민주화학섬유노동 조합연맹 대표들은 노 · 사 · 정 대타협 이후 연맹단위로는 처음으로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고 나섰다. 국민회의 당사와 노동부 청사 앞에서 시위한 이들은 새 정부에 대한 적의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정리 해고를 법제화할 때는 발 빠르게 움직이던 새 정부가 만연하고 있는 부당 노동 행위에 대해서는 팔짱만 끼고 있다며‘국민의 정부가 아닌 국민을 울리는 정부’라고 성토했다.

 정리해고에 대해 민주노총보다 유연한 입장을 보여 온 한국노총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노총은 전경련 등 경제 5단체에 부당 노동 행위 확산을 경고하는 서한을 보낸 데 이어, 노동자들을 불법 해고한 사업주들을 계속 노동부에 고발하고 있다.

정부, 불법 일삼는 기업에 불이익 줘야
 1월16일 한국 노총 사무국 고발센터에 접수된 부당노동 행위사례는 무려 1천6백여 건에 달한다. 한국노총 홍보국장 최대열씨는‘이대로 가면 노사관계는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말한다. 본격적인 춘투를 앞두고 노사 간에 일촉 즉발의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법의 물렁한 구석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정치력뿐이다. 새 정부가 적극 나서 부당 노동 행위를 일삼는 기업에게 불이익을 준다면 불법해고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사용자측도 어렵더라도 법의 테두리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경제회생의 중요한 고비에서 한국 사회는 다시 최루탄 연기 자욱한 복고풍 풍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文正宇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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