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이사제 첫발부터 ‘뒤뚱’
  • 성기영 기자 ()
  • 승인 1998.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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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 · 책임 불분명해 경영 감시 어려워… 인력도 태부족

 제너럴 모터스(GM)는 미국에서 사외이사제도를 가장 잘 운영하는 기업으로 꼽힌다. 물론 미국 기업의 사외 이사는 과거 5년간 회사에 고용된 적이 없어야 하고, 자신이 몸 담을 회사와 거래가 전혀 없어야 한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한국 재벌들에게 요구했다면 당연히 퇴직 고위 관료등 이른바‘실력자’를 사외이사로 고용해 로비스트로 써먹으려 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영 감시라는 사외이사의 본래 취지는 처음부터 빛이 바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GM은 이런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이사16명중 의장과 부의장을 제외한 14명을 모두 사외이사로 채웠고, 그 대부분은 경영자 출신이었다.

 미국 100대 기업의 이사 수는 평균 13명정도. 이들 중 사외이사는 평균 10명이다.(93년 기준). 그만큼 이사회는 경영 실적을 객관적인 처지에서 평가하고 감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사업을 집행하는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을 엄격히 분리해, 자신의 실적을 스스로 평가하는 데서 오는 위험을 최대한 줄이겠다는 의도이다.

 이 밖에도 회사 안에 감시위원회 · 재무위원회 같은 여러 위원회를 설치한다. 대부분이 회사 스스로의 필요에 따른 것이다. 공공문제 위원회나 환경문제 · 종업원복지 위원회 등을 따로 두는 회사도 있다. 미국이 주주(株主) 민주주의(share-holder democracy)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라는 권리의식이 깔려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이런 세부적인 장치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막 사외 이사제를 도입한 한국에서도 사외 이사가 이런 감시기능을 충실해 해낼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경영진 자세 변해야 정착 
 사외이사는 한국에서도 전혀 낯선 제도가 아니다. 현대가 96년 정몽구 회장 취임 때 이 제도를 도입했고, 포항제철 · 데이콤도 사외 이사제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포항제철은 이사 19명중 사외 이사가 반수가 넘는 10명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중에는 뉴욕 은행 부행장 출신인 외국인 사외 이사도 있다. 외국인 투자가들이 특히 포항제철을 신뢰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첫걸음을 내디딘 사외 이사제가 전시용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 통과해야 할 첫 관문은 이사 선임과정. 현재로서는 사람 구하는 것부터가 여간 힘들지 않다. 7백개가 넘는 상장 회사 이사의 25%를 사외 이사로 채우려면 전문 인력이 적어도 2천명 가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법을 전공한 변호사나 경영학 · 경제학교수, 공인회계사 등이 우선 물망에 오른다. 하지만 국 · 공립 대학교수는 교육공무원법과 국가공무원법의‘영리 법인에 겸직할 수 없다’는 규정에 저촉되어 사외 이사를 맡을 수 없다. 회계사들도 기업의 재무 상태를 감시해야 할 외부 감사인이어서 선뜻 나서는 사람이 별로 없다. 경영자 출신 사외이사라 하더라도, 같은 업종이거나 거래가 있었던 회사 출신이면 선정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벌써부터 대기업들은 이사 줄이기에 나섰다. 지난달 주주 총회를 개최한 대우중공업은 김두회 전 법무부장관과 박성상 전 한국은행 총재 등 중량급 인사2명을 사외 이사로 선임하면서 이사 수를 25명에서 8명으로 대폭 줄였다. 이사 숫자를 아예 줄임으로써 전체 이사의 8%밖에 안 되는 사외이사 비율을 정부가 제시한 기준인 25%로 늘린 것이다.

 미국 공인회계사이자 국제 변호사인 김병국 K&P 컨설팅 대표는“사외이사의 권한과 책임이 세부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채 지금처럼 사외이사제가 추진된다면 또 하나의 거수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라고 우려했다. 가장 앞서서 2년 동안 사외 이사제를 운영한 현대그룹도 이 제도가 정착하려면 경영 정보가 공유되고, 사외 이사들의 건의를 수용하는 경영진의 자세가 요구 된다는 중간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마냥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모범적으로 사외 이사를 운영한 ,GM역시 사외 이사들이 담합해 회장을 몰아냈던 상처를 갖고 있다. 81년부터 10년에 걸친 구조 조정 작업이 결국 실패로 돌아간 다음이었다. 사외 이사들이 힘을 과시해 최고 경영자를 깜짝 놀라게 한 뒤 이 회사는 성장의 페달을 더 힘차게 밟았다. 미국식 경영의 핵심인‘견제와 균형’의 효과를 증명해 보인 셈이다.                                            
成耆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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