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의 시체 넘고 넘어 3선 고지 오르는 옐친
  • 허광준 기자 ()
  • 승인 1998.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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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료 전원 사표 받아‘대학살’… 재집권 노린 다목적 카드

정 러시아때 가장 흔한 처형법은 교수(絞首)와 참수(斬首)였다. 특히 봉건지주 권력의 권위에 도전하는 혁명가들은 둔탁한 도끼로 내려치는 참수형에 처해지기 일쑤였다. 시민 혁명의 기운이 유럽을 휩싸고 있던 18세기 중후반, 혁명 감염을 두려워한 제정 러시아의 절대 권력자 차르는 파상적으로 일어나는 농민폭동의 주동자들을 줄줄이 참수대로 보냈다.

 3월23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급작스럽게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총리를 포함해 내각을 모조리‘목자른’것은 서방 세계에는 제정러시아 시대를 떠올리게 할 만큼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른바‘예측가능성’을 건강한 사회의 중요한 한 지표로 삼는 구미사회의 시각으로 보자면, 특별한 사건이 터진 것도 아닌데 갑자기 각료30명에게 모조리 사표를 받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를 ‘월요일의 대학살’이라고 표현했다. 무엇이 옐친대통령으로 하여금 이같이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게 했는지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옐친 대통령은 지난 두 주일 동안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대통령 휴양지에 머물렀다. 67세 노구에 무시로 찾아오는 병 때문에 고통받는 그는, 최근에도 호흡기질환으로 알려진 병 때문에 절대안정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옐친대통령은 프랑스대통령 · 독일총리와의 정상회담도 휴양지에서 준비했다. 그가 휴양지를 나와 모스크바에 들른 것은 몇 시간이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에 그는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를 만나 면담하고 각료들에게 사표를 내도록 했다.

 크렘린 당국이 녹화해 뉴스로 방영한 이 내각회의에서 옐친대통령은 창백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시행되지 않는 법령은 곧 죽음이자 종말이라는 점을 모두가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당신들 모두 이 자리에서 당장 사직서를 내라. 이게 전부다. 다른 선택은 없다.”

 세계를 놀라게 한 옐친 대통령의 깜짝쇼 배경에 대해 서너가지 분석이 나왔다. 우선 병약한 몸 때문에 나라 안팎에서 걱정하는 소리가 높아지자, 자기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는 분석이다. 국가 원수로서 정국 주도권을 놓을 의사가 전혀 없으며, 2000년 대선을 앞두고 일찌감치 시작될지도 모를 권력 누수현상을 용남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과시했다는 것이다.

체르노미르딘 총리가 쫓겨난 까닭
 다른 분석은 옐친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에 주목한다. 그는 아무리 자기 측근이라도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성장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대립하는 세력을 적절히 중용해 서로 견제하게 하면서 고만고만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그의 용인술이다. 이런 점에서 체르노미르딘이 너무 큰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부 분석가들은 옐친대통령이 이대로 가면 다음 대선에서 자기가(혹은 자파가)재집권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초강수를 두었다고 본다. 이미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당수, 야블로코당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당수, 알렉산데르레베드 전 국가안보위 서기등 쟁쟁한 경쟁자들이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고 일찌감치 대선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지지부진한 경제개혁에 발목이 잡힌 상태에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동기에서 하루빨리 내각을 신선한 얼굴로 갈아 치우고 개혁을 가속화하는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분석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옐친은 내각을 해산한 뒤“경제개혁을 좀더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하기위해 내린 조처다”라고 말했다.

 체르노미르딘은 92년12월에 총리에 올랐다. 불안정한 러시아 정국에서 꽤 장수한 셈이다. 그는 시장경제를 향한 개혁을 놓고 개혁파와 보수파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러시아정치지형에서 어중간하면서도 효과적인 중도노선을 취해 온 덕에 5년 넘게 총리자리를 지켰다. 그는 기회 있을때마다 스스로 개혁지지자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조심성이 때로는 과감한 변화를 늦추거나 가로막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는 개혁주의자 추바이스 제1부총리와 대립하면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얼마전에는 다음 대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금융계 핵심인물들을 자기캠프로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사실이 옐친 대통령의 민감한 안테나에 걸린 것으로 보인다. 총리직에서 물러나 여당 계열인 ‘우리집 러시아당’총재로 복귀한 그의 정치생명이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이번 사태와중에 등장한 새별은 세르게이 키리옌코 에너지장관이다. 새 내각을 구성할 총리서리로 임명된 그는 올해 35세로, 정치적 나이로따지면 약관이라 할 만하다. 그는 석유회사 사장으로 일하다 97년7월 보리스 넴초프 전 제1부총리의 보좌관으로 기용되어 관계에 등장했다. 그 뒤 4개월만에 넴초프가 겸임하던 에너지장관을 물려받았고, 다시 4개월만에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러시아의 2인자로 떠올랐다. 크렘린당국은 키리옌코가 차기 총리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개혁을 밀어붙이기에 적임이라 할 만큼 패기만만하지만, 국정을 요리하기에는 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다. 야당이 장악하고 있는 의회는 바로 이 점 때문에 키리옌코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내각이 옐친 친정체제로 재구성되는 데 따른 위기감이 작용한 듯하다. 옐친의 경쟁자인 레베드는 “옐친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개인적 충성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규범이 되므로 그들이 새로운 구조를 창출하기는 불가능하다”라고말했다. 의회 다수당인 공산당의 주가노프 당수도 초당적 내각 구성을 제의하면서, 내각을 다 떠맡기에는 키리옌코의 경험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이유로, 의회의 총리 인준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야당의 반응에 대해 옐친은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는 3월27일 의회에 보낸 서신을 통해, 의회가 키리옌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해산해버리겠다고 공언했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계산된 전략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의회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카드를 던짐으로써 대립을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 총선을 실시해 3선출마의 기틀을 다지려는 속셈이라는 것이다. 현재 러시아헌법은 대통령직을  한 차례중임으로 제한하고 있지만, 두 번째 임기에 있는 옐친 대통령의 첫 임기는 옛 소비에트 헌법에 근거를 둔 것이어서 좀 모호한 상태다. 따라서 옐친이 다음 선거에 나오려면 무리해서라도 판을 흔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키리옌코 총리 밀어붙이기→야당의 극력반대→의회해산’해법은 의원들이 가장 꺼리는 길이기도하다. 안정된 의원직을 걸고 모험을 하기에는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내각과 의회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가능성도 크다.

 젊은 키리옌코의 운명은 옐친대통령이 그를 1회용으로 활용하느냐 아니면 좀더 무게를 실어 주느냐 여부와, 야당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있다. 키리옌코총리서리는 우선은 옐친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는 취임일성으로 “정부는 일은 좀 더하고 말은 좀 덜해야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옐친 대통령이 내각에 사표를 받으면서“나는 당신들이 정치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산적한 문제를 푸는 데는 시간을 쓰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나무란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젊은 개혁가들이 정국 주도할 듯
 만일 키리옌코가 서리 꼬리표를 떼고 정식 총리가 될 경우, 90년대   아나톨리 추바이스 전 제1부총리나 보리스넴초프 전 제1부총리 같은 젊은 개혁가들이 주도했던 러시아 정국은 다시 젊은 개혁가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게다가 옐친대통령은 이번 내각 해산을 통해, 속뜻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개혁에 가속도를 붙이려고 액셀러레이터를 한껏 밟아 놓은 상태다.

 옐친 대통령에게 사표를 낸 각료들 중 신임을 받고 있는 일부는 새로 구성되는 내각에 그대로 참여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외무장관과 이고르 세르게예프 국방장관은 유임되었다.

 국유산업 민영화 같은 경재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러시아 사회가 2000년 대선이라는 큼직한 여울을 앞두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눈길이 모이고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옐친 대통령의 건강이다 최고 권력자의 건강이 중요하다는 일반론 때문이 아니다. 몸이 불편해 휴양지에서 쉬고 올 때마다 반드시 살생부를 들고 나타나는 그의 인사스타일 때문에 러시아 정가뿐 아니라 러시아의 파트너인 주요 국가들도 그의 건강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許匡畯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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