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자 파멸시키는 ‘백색 유혹’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1998.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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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복용자 늘고, 판매 조직에도 가담…우울한 현실 잊으려 손댔다 쇠고랑

 건축 자재 수입업자인 이성보씨(36·서울 을지로)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연간 5억원대를 벌어들이던 ‘잘 나가는 사장님’이었다. 그러나 올 들어 그는 하루아침에 10억원대 빚더미에 올라서고 말았다. 환율이 폭등해 유럽에서 들여온 자재(통나무) 수요가 뚝 끊긴 탓이다.

 파산 상태를 맞아 채권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이씨는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지내다가, 자기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을 바꾸어줄 ‘구세주’를 찾아 나섰다. 숨어 지내던 여관에서 만난 필로폰 공급업자가 ‘기발한 사업 아이템’이라며 이씨더러 중국에 다녀오라고 권유한 것이다.

 이씨는 지난 3월 이 업자의 소개로 만달러를 마련해 중국 선양(癬陽)으로 가서 필로폰을 5백g샀다. 이를 국내에 몰래 들여온 이씨는, 서울 시내 카페를 돌며 이를 팔다가 단속 경찰에 덜미가 잡혀 마약 사범 신세로 전락했다.

 범야식품(주) 차장으로 근무하다가 지난 2월 정리 해고된 김영호씨(40)는 퇴직금으로 마약에 손을 댄 경우이다. 퇴직금 8천만원으로 새 인생을 설계하던 김씨는 동생 친구로부터 확실한 돈벌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귀가 솔깃했다. 대만산 필로폰을 들여와 실직자에게 싸게 공급하면 큰 차액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동생 친구가 일러 준 대로 대만으로 날아간 김씨는, 필로폰을 8천만원어치 사서 국내에 가져와 중간 도매상에게 1억3천만원에 넘기려다 현장에서 경찰에 적발되었다.

마약 공급 조직, 박리 다매로 실직자 공략
 IMF 체제로 실업과 경기 침체가 심해지면서 마약 시장 판도가 변하고 있다. 일부 실직자와 사업 실패자 들이 일확전금을 노리고 마약 유통에 개입하는가 하면, 우울한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마약류에 중독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전에도 마약 사범이 꾼준한 증가 추세를 보였지만, 올들어 4월 말까지 검거된 마약류 사범은 2천여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45%나 늘었다. 주된 소비 계층은 실직자·가정주부·학생·운전기사등 다양하다.

 IMF 사태 이후 마약 시장에 새로 나타난 특징은 ‘박리 다매 전략’이다. 경제 파탄과 사회 불안 심리 확산에 편승해 마약류 공급 조직이 주머니가 비어 가는 실직자들을 공략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필로폰 1회 투약분(0.03㎎) 가겨이 지난해 말까지 15만원 하던 것이 최근에는 3만~4만 원대로 급락한 데서 잘 나타난다.

 마약 공급 조직은 하루하루를 고통과 우울 속에 보내는 실직자와 사업 실패자 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고, 심지어 이들 가운데 일부를 하수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회사가 부도 나 퇴직금도 못 받고 거리로 나앉은 나종권씨(37)도 그런 경우이다.

 중장비 기사인 나씨는 반년째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술로 보냈다. 그러는 사이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부인이 아이를 데리고 가출하자, 나씨는 서울역·이태원 등지를 전전하며 노숙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지난 3월 말 나씨는 이태원에서 우연히 만난 필로폰 밀매자를 통해 필로폰을 알게 되었고, 여기에 의지해 괴로움을 달래 왔다.

 처음 몇 번은 필로폰 밀매자가 나씨의 팔에 공짜로 주사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횟수를 거듭하는 동안 중독 증세가 나타난 나씨는 ‘무슨 짓이든할 테니 주사를 맞게 해달라’고 하소연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노숙자 처지에 1회 투약에 10만원씩(당시 가격)하는 필로폰 공급 조직의 하수인이 되어, 마약 심부름을 하는 대가로 가끔씩 필로폰 투약을 받다가 마약 퇴치 상담소를 찾았다.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의 한 관계자는 “사업 실패와 실직으로 좌절해 마약을 복용했다가, 가족·친구에게 발견돼 상담을 신청하는 사람이 한달 평균 30여 명에 이른다”라고 말한다.

 현재 국내 마약소비 시장에서 유통되는 주된 마약류로는 단연 필로폰이 꼽힌다. 80년대 말까지 아시아의 필로폰 생산 기지 구실을 했던 한국은 그뒤 중국에 그 자리를 내주고 공급 및 소비 기지로 변했다. 90년대 초 당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초해 밀조 조직을 대대적으로 단속하자 제조 기술자들이 속속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인건비가 싼 조선족을 고용해 중국 동북부 지방에 널리 자생하는 에페드린이라는 나무에서 필로폰 원료 물질인 염산에페드린을 추출해 값싼 필로폰 제조 기술이 중국 범죄 조직 삼합회와 일부 조선족 기술자들에게 전수되어, 국내 밀매 조직은 이들을 통해 필로폰을 공급받는다. 서울지검 강력부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필로폰이 국내 필로폰 공급 물량의 70%를 차지한다고 파악한다.

 이렇게 들여온 필로폰은 지난해 말까지 여유 계층의 ‘특권 마약’(1회 투약분 약 15만원)이었지만, IMF사태 이후 공급 조직이 박리 다매 전략을 펼침에 따라 값이 떨어졌고, 소비 계층도 널리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일부 실직자가 퇴직금으로 필로폰 밀수업자 대열에 가세하면서, 마약상에게 사기를 당하는 웃지 못할 일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중국에서 가짜 필로폰 들여오다 적발되기도
 지난 2월 중국 연길에 사는 조선족 필로폰 제조업자에게 5천달러를 주고 필로폰 4백g을 밀반입한 실직자 정진수씨(34)는 서울 시내 카페를 돌며 판매하려다 경찰에 붙잡혔다. 그런데 정씨로부터 경찰이 입수한 필로폰은 가짜였다. 중국 마약상이 초보인 정씨에게 필로폰인 것처럼 보이는 프로카인이라는 화학 약품을 팔았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에 가서 프로카인을 필로폰으로 속아 샀다가 공항 또는 국내 밀매 현장에서 적발된 사람은 올 들어 정씨 외에도 6명에 이른다. 마약으로 한몫 잡으려는 실직자들이 생겨나면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실직자와 사업 실패자를 상대해 박리다매 전략을 펼치고 있는 마약 중개상들은 품목 다양화 전략도 구사하고 있다. 값이 내린 필로폰조차 소비할 경제 여력이 없는 계층을 상대로 대마초와 헤쉬쉬, 혼성 대마초(헤로인+대마초). 병원 마약(러미널 등 환각성 의약품) 따위 값싼 대용 마약이 널리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마약류 중 헤쉬쉬는 IMF 사태 이후 국내에 대량으로 들어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마초 진액을 추출해서 만든 헤쉬쉬는 대마초보다 8~10배 강한 환각성분을 지닌 마약으로, 서구의 하류 계층에 널리 퍼져 있다.

 서울지검 강력부(박영수 부장검사)는 지난 4월23일 국내에 헤쉬쉬·대마초 등을 대량 밀반입한 국제 마약 밀매 조직원 22명을 적발해 구속했다. 수사 결과 헤쉬쉬는 IMF 사태로 환율이 하락하자, 외국인 관광객·보따리 장사 등으로 위장한 마약 사범들이 서울 강남 일대의 학원가·단란주점 등에 밀매망을 구축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단기 비자로 입구한 후 불법 체류하면서, 한국 여성을 사귀어 동거하고, 동거녀를 수취인으로 지정해 헤쉬쉬를 국제 특급 우편으로 받아 밀매하는 수법을 썼다. 신분을 주한미군으로 위장한 국제 마약 밀매단에 10대 소녀·백화점 점원·여대생·이혼녀·주부들이 쉽게 농락당했으며, 이들은 마약을 함께 투약하고 판매망을 개척하는 데도 협력한 것을 드러났다.

 이밖에도 외국인 마약 중개상은 실직한 국내 외국인 노동자(불법 체류자)를 공급책으로 포섭하는가 하면, 이들을 일본·미국·캐나다 등지로 재출국시키기 위해 여권을 위조하는 등 대담하게 국제 인력 브로커 노릇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서울지검 강력부 박영수 부장검사는 “국내에서 직장을 잃은 불법 체류 외국인들이 내국인 실직자를 상대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마약류에 손대기 시작했다고 보고, 이들의 동태를 집중 감시하고 있다”라고 밝힌다.

 거품 경제 시대에 향락 추구 풍조를 반영했던 한국의 마약 시장은, IMF 시대에 들어서서는 현실에서 도피하는 수단으로 더욱 확산되고 있다. 우울한 실직자들을 환상처럼 유혹하는 백색 공포의 덫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도 이제 외면할 수 없는 ‘실업자 대책’의 하나로 떠올랐다.
丁喜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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