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한 ‘위법’ 패배한 ‘이성’
  • 김 훈(사회 · 기획특집 부장) ()
  • 승인 2006.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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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경의 위법관행에 경종을 울린 경찰관 고발사건은 방판사의 패배로 원점으로 돌아갔다”


 

직권을 남용해서 인신을 불법구금한 경찰관과 그들의 헌법유린 행위를 ‘혐의없다’는 이유로 기소하지 않은 검찰의 처분에 대해 ‘위법이지만 정당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 결정은 그같은 위법행위를 자행한 검찰과 경찰의 결정이 아니라, 검 · 경의 위법행위를 재정한 법원의 결정이다. 영장기각 후에도 피의자를 계속 구금한 경찰관들의 관행화된 헌법파괴 행위를 바로잡고, 그 관련자들을 처벌해달라고 요구한 방희선 판사의 경찰관 고발사건은 이렇게 해서 이 사회의 공식적인 마지막 판단을 받았다.

경찰관들의 소행은 직권남용 · 감금이라는 위법행위에 해당하고, 검찰의 무혐의 처분 역시 위법이지만, 이들의 위법은 결과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내용의 핵심이다. 방판사의 경찰관 고발사건의 본질적 핵심은 명백히 존재하는 탈법, 구조화되고 관행화된 탈법의 정체를 인식하고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힘과 의지를 우리 사회는 과연 보유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하는 일이었다.

위법이 정당하다면 법은 부당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법원의 답변은, 우리 사회의 탈법은 헌법유린이 관행으로 굳어질 정도로 뿌리깊은 것이지만 우리는 그 관행화된 탈법을 바로잡거나 응징할 힘이 없으며,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는 말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위법이 정당하다’는 이 판단 안에는 이른바 ‘한국병’이라고 이름 붙여진 병리현상의 징후가 들어 있다고 할 것이다. 위법이 결과적으로 정당하다면, 법은 결과적으로 부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 속에서 실현하기 불가능한 법적 이상과, 현실 속에서 준수할 수 없는 법률조문, 준수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정당’한 법조문들을 헌법, 혹은 형사소송법이라고 법전 속에 싣고는 그 무의미한 법의 형식 밑에서 근대국가 만들기의 과정들을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이다.

이 허송의 세월이 또 흘러서, 방판사가 경찰관을 고발한 사건은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 원점에는 ‘법이란 왜 존재하는가’라는 치매하고도 절망적인 질문이 전진 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법원은 위법한 현실의 위법성을 규명하고, 그 위법의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위법한 현실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있고, 이른바 法理라는 것은 그 위법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경찰과 검찰은 위법한 존재이지만 현실적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애초에 문제를 제기했던 한 젊은 판사는 그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위법을 자행한 경찰과 검찰의 소행이 왜 정당한가를 설명하는 법원의 ‘말’ 속에는 이른바 법리라고 할 만한 것이 들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법원에 따르면, 경찰관이 고발된 이후 검찰과 경찰수뇌부에서 내부를 단속하는 공한을 하급기관에 발송해서 인권침해방지의 장치가 마련되었으며, 이 사건이 여론화됨으로써 사회에 인권존중에 관한 경종이 이미 울려졌고, 또 탈법을 자행한 경찰관들이 그동안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참작해야 하므로, 이 위법한 행위가 결과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검 · 경의 위법 어루만진 ‘자애로운’ 법원

법원의 이러한 언어와 사유 속에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하여 인간사회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상처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완강한 보신주의와 법원이 수사기관에 대하여 지닌 공동체로서의 잠재적 연대의식이 내포되어 있음이 느껴진다. 법원은 마치 망나니 친자식의 거듭된 과오를 다독거려주는 어버이의 눈먼 자애로운 손길로 경찰과 검찰의 위법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법률을 공부해서 일가의 생애를 이룬 지식인으로서 ‘위법이 정당하다’는 결정문을 쓰고, 또 그 결론을 위해 논리를 동원하는 어떤 높은 판관들의 모습은 연민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위법이 정당’하기 때문에 경찰은 이제 영장 없이 인신을 구금해도 법의 규제를 받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법을 운영해오며 오랫동안 계속된 관행이 이제 현실적 힘을 얻게 되었다. 적어도 그러한 판례들이 확정된 것이다. 이것이 경찰과 검찰이 승리한 내용이다. 경찰은 삼권분립된 근대국가의 치안조직이기를 포기하고 절대권력에 종속된 중세의 포도청으로 스스로를 비하시켰고, 법원은 경찰이 중세의 포도청으로 남아 있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검찰과 경찰이 승리를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우선 옷을 벗지 않아도 좋도록 자애로운 배려를 받았다. 그리고 시대로부터 한없이 먼 역사의 뒷선으로 밀려나버렸다. 검 · 경이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사태는 어느 쪽의 승리도 어느 쪽의 패배도 아니다. 다만 역사상에서의 이성의 패배일 뿐이다. 사법적 이성의 구현자이어야 할 법관이 스스로 ‘위법이 정당하다’는 사유를 법의 이름으로 공포할 때, 사법권 전체가 국민으로부터 불신의 대상이 되리라는 예측은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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