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깡 한국’의 유산을 청산하자
  • 박상기 <시사저널>편집장 ()
  • 승인 1998.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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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50주년 8 · 15

 참으로 잔인한 8월이다. 하늘 한쪽이 무너진 듯 쏟아붓는 폭우로 가옥과 농경지가 침수되고 사람도 짐승도 떠내려갔다. 강바닥의 모래를 퍼올리던 크레인의 긴 목이 감쪽같이 잠길 정도로 차오른 강물이 어느 한순간에 강둑을 무너뜨릴 것만 같은 기세다.

 그 강둑 아래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허리띠를 바짝 조른 채 애면글면 살아가는 수십만 민초의 생목숨이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다. 강물이 범람하거나 수압을 못 견디어 제방이 무너져 버린다면 상상치 못할 참극이 빚어질 것이 뻔하다. 강과 개천 유역 저지대 주민들로서는 성난 강물을 머리 위에 이고 전전긍긍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수재민이나 아슬아슬하게 재앙을 피한 저지대 주민들뿐이랴.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사람에게 8월의 폭우는 비상(非常)이고 재난이다. 무너진 다리와 도로, 흙탕물에 잠긴 마을과 농경지를 복구하고 십여 만 수재민이 생업을 되찾으려면 얼마 만큼의 인력과 예산을 쏟아부어야 할지 난감하다. 그렇잖아도 구렁텅이에 빠져 회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제의 발목에 바위덩어리를 매단 격이요, 실업과 불황의 터널에서 악전고투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또 한 장의 빚문서를 들이민 격이다.

 극심한 경제난에 수해까지 겹쳐 안팎곱사등이로 시련을 겪는 8월이지만, 유례 없이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정부 수립 50주년 8·15는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다. 마땅히 희망과 풍요 속에서 맞아야 할 건국 50주년 기념일을 우리는 궁핍과 불안 속에서 맞이하고 있다. 어쩌면 기상청 집계 이래 최악인 이번 폭우는 그 궁핍과 불안을 적당히 호도하려는 오만한 술책, 아직도 제 허물을 잊고 날뛰는 정상배와 모리배 군상, 이들이 뒤엉켜 일으키는 부도덕과 몰역사성에 대한 하늘의 징벌일지 모른다. 창날같이 내리꽂히는 빗줄기가 이땅을 병들게 하고, 이 나라의 살림을 거덜내고, 이 땅의 사람들이 힘겹게 가꾸는 희망의 채마밭을 짓뭉개버리는 것들의 부패한 거품을 말끔히 씻어내 새 땅에 새 날을 오게 하는 씻김굿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제통화기금 신탁통치’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듯이 우리는 지금 50년 전에 힘겹게 되찾은 주권의 상당 부분을 제약받고 있다. 대통령이건 시골 농부이건 역사 앞에서, 순국 선열의 영령들에게 엎드려 참회하는 마음으로 8·15를 맞이하는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허장성세를 부리느라 조상의 묘자리를 팔아먹은 불효자와 다름없는 심정으로 건국 50년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그 안에서 버려야 할 것과 계승해야 할 것을 선별해야 할 것이다.

민초에서 권력층까지 ‘부끄러운 과거’ 공유
 모든 생물의 성장 과정은 크게 신장기와 내용 충실기로 나뉜다고 한다. 사람도 한창 키만 삐죽 크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키는 덜 자라되 뼈대가 굵어지고 근육이 단단해지는 시기가 있다. 우리는 건국 이래 앞만 보고 냅다 뛰는 역사를 지속해 왔다. 그 지칠 줄 모르는 뜀박질의 나날 속에서 천형과 같은 보릿고개를 극복했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 성장률을 나타내는 그래프의 곡선을 한치라도 더 높이 끌어올리는 것이 지선이라는 명분에 눌려 사회 정의도 민주 의식도 정치 발전도 돌볼 겨를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패와 부정, 반민주와 불의를 용인하고, 민초에서 최고 권력층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을 주요한 생활의 법칙으로 주고 받은 부끄러운 과거를 공유해 왔다. 정부 수립 50주년이 되는 8·15는 수수깡처럼 속은 텅 빈 채 키만 늘여온 비정상의 성장 신화를 깨뜨리는 새 날이 되어야 한다. 수수깡식 성장의 허약한 내부, 다 파먹은 김칫독처럼 텅빈 공동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삶의 전방위적인 원칙으로 정착시켜가고 있는가. 국제통화기금 사태를초래한 국가 경영 기술의 부실은 어떠한 구조 개선을 통해서 보완해 가야 하는가. 실의에 젖은 국민의 국난 극복의 대열에 끌어모을 사회 통합의 키워드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진정한 고뇌의 결과로서 국가 개혁 프로그램이 짜이고, 개혁 중추의 열정을 발판으로 가감 없이 실천될 때 ‘수수깡 한국’, 버리고 싶은 유산을 말끔히 청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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