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에게 열린 ‘한국 서화의 성전’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8.08.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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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의 <근역서화징> 70년 만에 한글 번역 · 출간 … 원전의 오류 3백 50여곳 바로잡아

‘미술 사학도의 성전(聖典)’‘서화(書畵)문화사의 큰 보전(寶典)’이라 불리는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 1864-1953)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 한글로 번역 · 출간 되었다. 이 책은 한국 미술사 · 서예사의 전체 윤곽을 그리고 뼈대를 세운 귀중한 문헌임에도 순한문으로 기록되어 그동안 관련 연구자들 외에는 해독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국역 근역서화징>(시공사)이 출간됨으로써 연구자는 물론 일반인도 이 ‘성전’을 수월하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미술연구소(소장 홍선표) 기획으로 김보셩 김상엽 김인규 나종면 씨 등 동양고전학회 소속 젊은 연구자 8명이 함께 번역하고, 원로 한학자 홍찬유옹(사단법인 유도회 한문연수원장)이 감수한 <국역 근역서화징>은 국역본 2권과 영인본 1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93년 국역 사업에 착수한 지 5년만에 완성되었다.

 <근역서화징>은 3 · 1 운동을 주도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개화 관료 · 애국 계몽 지사 · 언론인 · 서예가로 이름을 떨쳤던 위창의 여러 업적 가운데서도 최고의 성과로 꼽힌다. <근역서화징>에 의해 한국 서화사가 처음으로 정리되었으며, 그 이후 모든 연구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근역서화징>은 신라 시대 솔거에서부터 고려 · 조선을 거쳐 1928년 이 책이 발간되기 직전에 타계한 정대유 · 나수연에 이르기까지 모두 1천1백17명(서예가 3백92명 · 화가 5백76명 · 서화겸비 1백49명)을 수록했다. 이 책에서 위창은 시대를 신라와 고려, 조선 상 · 중 · 하로 나누고 역대 서화가를 출생 별로 배열했다. 서화가 이름에 이어 자 · 호 · 본관 ·가세(家世) · 출생연도 · 수학(受學) · 관직 · 사망 연도를 밝히고, 그 예술에 대한 각종 문헌 기록을 붙였다.

본문에 나온 작품 1백2점 사진 수록
 위창이 역대 서화가들의 자취를 밝히기 위해 인용한 국내외 문헌은 모두 2백70종에 이른다. 각종 족보와 고문서 · 금석문 들도 광섬위하게 동원되었다. 이를테면, 신라 시대 솔거에 관한 내용은 <삼국사기 열전><지봉유설>등에서, 추사 김정희에 관한 대목은 <완당집><경수당집>등에 실린 기록을 인용했다. 여러 기록에서 해당 내용을 발췌해 총망라하고 그 출전을 밝히는 형식이다.

 서화가에 대한 위창의 짤막한 논평도 덧붙어 있으나,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여러 자료들이)흩어지고 없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이를 모아 차례대로 엮어 다섯 편을 만들었다.’고 위창이 밝혔듯이, <근역서화징>을 편술한 목적이 문화 유산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근역서화사(史)>라는 처음의 제목이 <근역서화징(徵)>으로 바뀐것도 위창의 이같은 태도에서 연유한다. 역사를 해석하고 펴가하기(史) 보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려는(徵)데 더 큰 뜻을 둔 것이다.

 위창이 한국 역대 서화가들을 찾아 체계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집안 내력과 무관하지 않다. 위창의 집안 8대에 걸쳐 역관을 지낸 정통중인 가문으로,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방대한 양의 고서화와 금석문 탁본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위창의 아버지 오경석은 수장가로 명성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서화 감식에서 ‘귀신 같은 경지’라는 평을 들을 만큼 당대 제일의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가학(家學)을 이어받은 위창은 그 시대 최고의 이론가 · 감식가로서 우리 문화를 수호하는 데 큰 역할을 해냈다. 간송(澗松) 전형필(全滎弼 · 1906-1962)이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현간송미술관)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위창이 <근역서화징>을 펴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 것은 한 · 일 병탄이 이루어진 1910년에 책이 완성되었고, 그 11년 후인 1928년 육당 최남선의 권유로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에서 활자본으로 출판되었다. 그 이후 <근역서화징>은 연구자들에게 ‘육법 전서’와 같은 구실을 했으며, 조선을 상 · 중 · 하로 나눈 <근역서화징>의 시대 구분법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같은 이유로 <근역서화징>은 ‘한국 서화사의 처음이자 끝’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문학 · 한국 미술사 · 한국 철학 · 한국사 연구자들이 함께 번역한 <국역 근역서화징>은 원전을 그대로 옮겨 한자에 토(吐)를 달고 그 아래에 번역문을 싣는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분야 전공자들이 함께 토론하며 번역했다는 점 외에도 <국역 근역서화징>에서 빛나는 부분은 <근역서화징>에 수록된 여러 출전을 찾아 대조함으로써 3백50여 항목에 이르는 원전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는 것이다. 2천4백여 개의 역주와 8천항목의 방대한 인명 · 용어 색인, 본문에서 언급한 작품의 사진 1백2점을 함께 실은 것도 <국역 근역서화징>의 특징들이다.

 <근역서화징>이 70년 만에 한글로 번역 · 출간됨으로써 미술사학계는 오랜 숙제 가운데 하나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서화사 연구의 전기를 맞이했다. 무엇보다 반가운 일은, 한문에 까막눈일 수밖에 없는 일반 독자가 말로만 듣던 원전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위대한 고전 가운데 하나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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