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후손도 재산 되찾기 소송
  • 정희상 기자 ()
  • 승인 2006.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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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일제에 강탈당해... 증거 있으나 시효만료가 장애



매국노의 후손이 매국의 대가로 받은 부동산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려는 소송을 벌여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정반대되는 소유권반환(보상) 주장이 잇달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의 재산이 일제의 ‘보복’에 강탈당했다는 주장이 많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몰수당한 재산은 명백한 증거와 자료가 있는데도 광복후 ‘시효만료’등을 이유로 원상회복되지 않은채 국가 또는 개인의 소유로 넘어감으로써 독립운동가 유족들에게 뼈에 사무친 한을 남겼다.

 일제에 재산을 몰수당한 이후 지금까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유족들은 그 땅을 ‘아직도 해방을 못본 땅’이라고 표현한다. 아울러 민족정기를 재확립하는 차원에서 이완용 등 매국노 재산 몰수와 관련된 특별입법이 논의되고 있는 이 시점에 독립운동가의 피탈재산 보상문제도 같이 논의되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구국단 단장 고 정인호 선생 손자인 정진한씨는 요즘 일제에 강탈당한 서울 청량리 일대 토지 5천92평을 원상회복시켜 달라고 각계에 호소하고 있다.

 정인호 선생 소유이던 이 토지가 일제에 강점된 것은 1919년이었다. 구한말 경북 청도군소를 지내던 정인호 선생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없어지자 관직을 제공하겠다는 일제의 회유를 뿌리치고 독립운동에 투신해 상해 임시정부의 국내 자금조달책을 맡았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정인호 선생은 영모ㆍ법모 두 아들을 포함해 30여명으로 구국단을 결성해 임시정부 운영자금 조달을 더욱 조직적으로 펼쳐나가다 그해 가을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후 6년반 옥고를 치르고 출감해 보니 청량리에 남아있던 5천여평 토지는 조선총독부가 이미 몰수해버린 상태였다. 당시에 작성된 조선총독부의 토지 관련 서류에는 이 땅이 사정(査正ㆍ그릇된 것을 조사하여 바로잡음)에 의해 창덕궁과 조선총독부 앞으로 넘어간 것으로 기재돼 있다.

 

친일파에게 불하해주기도

 조부가 두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몸을 바침으로써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정인한씨는 조부가 남긴 ‘원한맺힌 토지관련 서류’를 고이 간직한 채 생계를 위해 전전하다 최근 국가를 상대로 한 보상 청구서를 쓰게 되었다.

 정진한씨는 “매국노 이완용 후손이 매국의 대가를 찾아나서는 현실에서 저의 기막힌 사연을 묻어두는 것은 오히려 민족정기 확립을 방관하는 일이라는 판단이 서 적극 찾아나서기로 했다”고 말한다. 광복후 국가에 귀속된 이 토지는 현재 민간인들에 불하돼 상가가 들어서 있다. 따라서 광복후 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원상회복시키지 않은 국가가 원주인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씨는 각 독립운동 단체 인사들과 함께 ‘독립운동가피탈재산보상법 입법추진위원회’를 결성해 국회에도 청원서를 냈다. 정씨는 이 토지자 진정한 ‘광복’을 맞으면 보상금을 광복회사업과 민족교육사업 기금으로 전액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가의 재산을 직접 몰수하는 방법 외에 친일파에게 불하해주는 수법도 썼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구한말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맞서다가 체포돼 처형당한 장윤덕 대장의 재산 피탈이 그런 경우이다. 장윤덕 의사는 1872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를 맡고 있던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맞았다. 주권을 빼앗기고 군대마저 해산당하자 장윤덕 의사는 1907년 4월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경북지역에서 일군과 맞서 싸웠다. 우리나라 항일의병사상 큰 승리로 기록된 1907년 9월의 문경 갈벌전투 승전도 장윤덕 대장이 이끈 의병이 이룩한 쾌거였다.

 그러나 갈벌에서의 승전 직후 일본의 군경합동작전에 크게 패한 장대장은 일군에 체포돼 1907년 9월 16일 경북 상주에서 총살형을 당한다.

 장남 시환은 일군의 볼모가 돼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에서 소학교를 마친 시환은 6년만에 일본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고 이후 고향에서 야학을 개설해 계몽운동과 민족 의식 고취 활동을 벌였다.

 장윤덕 의사의 재산에 일제의 손길이 뻗친 때는 바로 이무렵이었다. 장의사가 묻힌 경북 예천군 보문면 수계동 산 147번지 일대 임야 1백32정보(약40만평)을 ‘배일반역자 재산’으로 간주하여 이를 빼앗으려는 총독부와 친일파의 모략에 걸려든 것이다.

 

“국회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장의사 유족은 1908년 공포된 삼림법에 따라 소유권보존등기를 마쳤으나 보문사 최성환주지는 소유권자인 장의사가 항일의병활동으로 총살당한 데 착안해 대구지방법원에 ‘임야인도청구’ 소송을 냈다. 재판결과는 장의사칙의 승소였다. 그뿐 아니라 경북도지사는 이 땅을 조선임야조사령이 공포된 1920년 5월28일자로 장윤덕 의사의 소유로 확정지었다.

 그러나 1934년 보문화 최성환 주지는 총독부 임야조사위원외에 재심을 요청했고 위원회는 소유권자가 ‘배일도배’라는 진정인측의 모함을 받아들여 보문사에 소유권을 넘기도록 행정처분을 내렸다. 이미 법으로 확정된 소유권을 행정처분으로 뒤바꾼 이 사태는 보문사 최주지의 친일행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최주지는 인근 김용사의 김혜옹 주지와 함께 총독부가 실시한 사찰령을 적극 받아들이는 등 불교계 일각의 친일에 앞장선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친일행각은 강석주 스님이 1979년에 쓴 《불교 근세 백년》이라는 자료에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광복후 장윤덕 의사의 직계손자인 장기홍씨(87년 작고)는 50여차례에 걸쳐 소유권 반환을 요구하는 진정을 각계에 내는 등 집요한 권리회복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서류상으로는 이 임야가 장의사 소유임을 입증했지만 시효에 걸려 안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반세기에 걸친 독립운동가 재산 원상회복 작업은 장의사의 장손인 기홍씨의 사망으로 차손 기봉씨(63)손에 넘겨져 아직도 진행중이다.

 “순국선열인 조부님 소유 임야를 일제와 친일파의 야합으로 부당하게 빼았겼습니다. 그곳에는 아직도 일제가 총살한 조부님 산소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장기봉씨는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기어이 이 땅을 찾아 순국선열의 유지를 받드는 기금으로 사용하겠다고 밝힌다.

 이밖에도 최근 들어 독립운동가 유족들이 일제에 몰수당한 재산을 되찾겠다고 나선 예가 부쩍 늘고 있다. 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 이인규씨(66)는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190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증조부 이강연 선생 소유 토지(경북 문경군 가은면 완장리 소재) 23만여평이 일본인 및 일제 고등경찰 3명에게 강탈당한 사실을 밝혀내고 반환을 요구하고나섰다. 또 독립유공자유족회 부회장인 홍의찬씨(63)는 광복단 활동을 하다 고문사한 조부 홍현주 의사 소유의 경기도 화성군 소재 토지가 불법으로 강탈당한 점을 문제삼기 시작했다.

 최근 결성된 ‘독립운동가피탈재산 보상입법추진위워회’는 바로 그런 사연을 가진 유족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의 산물이다. 물론 이들 땅은 명백한 증거서류가 있는데도 현행 민법상 시효에 걸려 소유권 반환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이완용 후손의 재산찾기를 보면서 민족정기 가 땅에 떨어졌다고 판단한 이들은 특별입법을 통해서라도 일제가 빼앗은 독립운동가의 재산을 보상받아 민족정기 확립기금으로 사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완용 후손의 땅찾기 문제로부터 비롯된 민족정기확립운동은 그동안 역사의 뒷자락에 묻혀 있던 독립운동가 재산처리 문제까지 들춰냄으로써 거꾸로 뒤집힌 민족정기의 현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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