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이겨야 풍년 드는 벱이여”
  • 전북 고창ㆍ성우제 기자 ()
  • 승인 2006.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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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30년 내려온 전북 신평마을 ‘당산제’ㆍㆍㆍ줄다리기 등 옛모습 그대로 간직


 논밭에는 봄기운이 푸릇푸릇 돋아나고 있었다. 아침 9시경 풍물패의 소리가 마을에 퍼지자 사람들이 집에서 볏짚단을 서너개씩 들고 나왔다. 이들이 모여든 곳은 마을의 모정. 여름이면 논 갈던 농부들이 햇빛을 피해 잠시 쉬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정자이다. 음력 2월 초하루인데도 겨울비는 차가웠다. 찬 비를 피해 줄꼬기는 모정에서 이루어졌다. “어샤 어샤” 하며 힘을 모으는 노인들 입에서는 허연 입김이 새나왔다. 전북 고창군 고수면 신평마을의 마을굿인 당산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난 2월21일 줄을 꼬아 당산에 새 옷을 입히기 위해 모여든 사람은 남녀 합쳐 40여명이었다.

 마을굿은 지역마다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농사를 짓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행해지던 마을공동체의 제의이자 잔치이다. 마을에서 지킴이로 모시는 대상은 국수당 당산 당목 산신각 장승 서낭당 등 여러가지가 있다. 산은 ‘當이 있는 山’이라는 뜻으로 지킴이로 모실 만한 나무나 돌 같은 것을 마을의 주신으로 섬기는 것인데, 신평마을의 당산은 어른키 높이의 할아버지ㆍ할머니 당산과 지신당산 세가지이다. 해마다 설이면 사람들이 설빔을 해입듯 화강암으로 된 할아버지당산도 정월 대보름에 새 옷을 입는다. 올해는 신평마을 당산이 정월 대보름에 옷을 입지 못했다. 금기가 있기 때문이다.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마을에 초상, 혹은 출산이 있거나 개를 잡은 집이 있으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음력 2월 초하루로 연기한다.

 “줄에 손을 못대 애통이 터져.” 반 아름 두께의 60여m짜리 줄을 다 만들 때까지 마을 주민 安秉采씨(54)는 모정 주위를 빙빙 돌며 잔심부름만 했다. 상을 당한 사람은 신성한 줄에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이다. 올 정월 초하루에 부친상을 당해 당산제가 미뤄진 데 대해 안씨는 줄곧 미안해 했다. 이 잔치를 마련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며 지신밟기(집을 축원하고 잔치비용을 추렴하는 굿)를 할 때도 안씨는 돈 10만원과 쌀 한가마니를 선뜻 내놓았다.

 “올 한 해 곡식 잘되고 사람 평안하게 해주시기를 당산님께 비는 것이여.” 허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나온 劉孟鐘(76) 노인은 당산제를 지내는 뜻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산제는 이 마을이 생긴 2백30여년 전부터 한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 거행해 왔는데, 64년 가정의례준칙이 대통령령으로 공포되자 두 해를 걸렀다. 그 두 해 동안 마을 청년들이 죽는 등 불상사가 끊이지 않았다.

 3시간여 줄꼬기를 끝내고 줄을 꼰 사람들이 어깨에 줄을 메었다. 마을 큰 길로 줄이 들어서자 멀리서 구경하던 주민이 모여들었다. 마을이 번성했던 때는 50여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39가구에 1백60여명으로 줄었다.

 다섯 살 꼬마부터 팔순 노인까지 남녀로 편을 갈라 ‘선수’들이 줄 앞에 일렬로 섰다. 상쇠 노인의 꽹과리 소리를 신호로 줄을 당기자 칠순 할머니가 대나무 회초리를 들고 나타나 남자들의 손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여자들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믿음 때문에 남자들은 힘쓰는 시늉만 할 뿐이다. 여자편의 3전3승으로 줄다리기는 쉽게 끝이 났다. 줄을 어깨에 멘 ‘선수’들은 다시 일렬로 서서 풍물패를 따라 논으로 들어가 陣놀이를 시작했다. 상쇠가 앞장 서서 줄을 이끌자 줄은 여러 겹의 원을 이루며 용의 형상으로 꿈틀거렸다. 옛날 전장에다 진을 치던 형태를 재현한 것인데, 한 공동체의 단합된 모습을 과시하는 놀이다.

 꿈틀대던 용은 다시 일자로 풀려 마을 입구에 있는 할아버지당산으로 향했다. 풍물패가 더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자 당산의 헌옷이 벗겨지고, 당산 밑에서부터 새 옷이 탄탄하게 입혀지기 시작했다. 당산의 상단에서 줄머리를 줄 속으로 틀어박고 줄 머리 위에 넓적한 돌을 얹었다. 물을 대주는 용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돌로 머리를 단단하게 눌러 놓는 것이다.

 풍물패가 사람들을 이끌고 새마을지도자 집으로 들어선 때는 오후 1시가 지나서였다. 마을 아낙네들이 닭죽을 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수백, 수천명이 죽을 먹으러 몰려들었지.” 노인회장 鄭炯萬씨(66)는 옛날을 회상하며 지금은 죽 먹을 사람조차 없다고 한탄했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대처로 빠져나가 마을에 20대는 한명도 없고, 30대 일꾼도 세 명만 남아 있다.

 신평마을 당산제를 지켜본 소장 민속학자 朱剛玄씨는 “마을굿은 전북 우도와 전남 지역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이농과 젊은이의 감소로 그것마저 급격하게 사라져간다”고 말했다. 대규모로 벌어지는 경상도의 영산 줄다리기나 충남 당진의 기지시줄다리기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아 그나마 생명을 유지 하지만 소박한 형태의 마을 줄다리기는 보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씨는 “신평마을 마을굿은 옛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지신밟기에서 시작해 줄다리기에 이어 당산에 옷을 입히고 집굿으로 끝나는 이 놀이는 공동체의 결속력을 확인하고 지루한 휴한기의 일상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축제”라면서 자기 문화를 지켜가는 늙은 농민의 모습이 눈물겹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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