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동맹의 ‘중대 합의’를 바라보며 진주만을 기억하라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6.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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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희의 한반도워치]

 
진주만(펄 하버)은 평화로웠다. 65년 전의 상흔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날의 참상을  보존하고 있다는 ‘애리조나 기념관’ 역시 무덤덤해 보였다. 먼 발치에서 그랬다는 얘기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자 충격과 전율이 엄습해왔다. 기념관 바닥의 커다란 홈을 통해, 태평양의 검푸른 심연이 입을 벌리고,  그 바닥에 미국 해군 1천1백17명의 시신을 끌어안은 ‘전함 애리조나 호’의 흉물스런 모습이 누워 있었다. 당장이라도 원귀의 비탄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전함 애리조나는 1941년 12월7일 일요일 오전 7시30분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했다. 파손 정도가 너무 심해 병사들의 시신과 선체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기념관을 세웠다. 병사들의 인적사항을 기념관 뒷면과 입장권에 일일이 새겨 넣음으로써, 비극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만들었다. 4월20일은 목요일. 평일인데도 관람객들로 붐볐다. 관람을 끝내고 나설 때쯤이면, ‘Remember Pearl Harbor’ 소리가 저절로 나올 터였다.   

미국 국무성 초청 프로그램(IVLP)으로 미국 전역을 3주간(4월1~22일) 여행했다. 이번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공화당 보수 혁명의 진원지인 중부 캔자스시티와 남부 텍사스의 주도 휴스턴 방문이었다. 백인 보수 사회의 ‘완강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과 함께 은근히 긴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남부에서 만났던 많은 지식인 전문가들은 대체로 부시 대통령과 그 정부의 몇몇 민감한 정책들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부심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이 정부의 정책만 보고 미국이 전부 그렇다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는 얘기도 많이 접했고, 골수 공화당원조차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지경이라고 한다.

특히 이라크 전쟁과 종교 문제에서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분명 잘못되었지만, 빠져나올 수도 없는’ 처지를 설명하기 어려워했고,  종교적 관용을 건국이념으로 하는 국가에서 ‘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대통령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힘들어했다. 물론 풀뿌리 민주주의라든지 다양성이라든지 많은 장점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부시 정부 몇 년을 겪으면서 미국 사회가 일종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5월1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 양국의 국무·국방장관회의(2+2)에서 미·일 동맹의 획을 긋는 중대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앞으로 양국이 군사를 일체화하고, 일본 자위대의 활동 영역이 확대되리라는 것이다.

역사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미·일 ‘야합’

‘전함 애리조나 호’에서 받았던 충격이 떠오르면서, 여행 기간 만났던 미국 시민들과 지식인들이 과연 이 합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부시 대통령이 굳게 손잡은 고이즈미 총리는, 바로 1941년 진주만의 평화로운 아침을 살육의 아비규환으로 바꾸어놓은 전쟁 도발자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해온 인물이다. 이는 한국·중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맞섰던 당사자 미국의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이다.

 
부시 대통령 스스로가 태평양 전쟁 참전 용사(시니어 부시)의 ‘자랑스런’ 아들이 아닌가. 평소 하던 대로라면, ‘어이 고이즈미, 정신차려. 내 아버지가 야스쿠니의 전범들 때문에 죽을 뻔했어. 알아?’ 이렇게 몇 차례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꿀먹은 벙어리다. 그렇다면 자기 아버지가 참전했던 그 전쟁은 뭐고, 거기서 억울하게 숨져간 수많은 미국 청년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역사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동맹은 동맹이 아니라 야합일 뿐이다. 또한, 유한한 정권이 무한한 역사를 대신할 수도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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