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 잡히면 또 멈춘다
  • 박상기 <시사저널>편집위원 ()
  • 승인 1999.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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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개혁

정부의 재벌 정책을 두고 재벌 개혁이냐 재벌 해체냐 하는 논쟁이 뜨겁다. 김대통령이 8·15 경축사이에서 밝힌 재벌 정책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분위기이나. 개혁의 강도와 속도에 대해서는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재벌의 선단식 경여이나 재벌 총수의 전횡이 가져오는 폐단을 막자는 데는 별 이의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강압젇이고 급속하게 개혁이 추진되었을 경우, 재벌 기업이 지닌 순기능마저 상실되어 한국 경제를 무력하게 만들 것이라는 반발도 만만치 않다. 정부·여당은 재벌 개혁 강화를 다짐한 것이고, 이에 대한 세력은 감속(減速)을 주장하고 있다.

 논의의 초점을 이처럼 좁혀놓고 보면, 감속론이 시민의 공감을 얻기에는 논리적 근거가 희박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재벌 개혁이라는 과제는 현정권에서 처음 대두한 것이 아니다. 과다한 차입 경영, 족벌 체제 강화, 금융 독점 등 재벌 체제가 갖는 여러 가지 부작용은 80년대 후반부터 누누이 지적되어 왔다. 노태우 정권이나 김영삼 정권에서도 재벌을 중심축으로 가동되고 있는 우리 경제의 지배 질서를 바꾸고자 하는 시도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때로는 통치자의 정책의지로, 때로는 경제 참모진의 국정 개혁 과제로 단골 메뉴이듯이 재벌 개혁이 표명되어 왔다.
 
‘감속론’ 함정에 빠지면 개혁 못할 수도
 그러나 개혁 의지는 그때마다 강력한 반발에 밀려 뜬구름처럼 흩어졌을 뿐, 날이 갈수록 재벌의 덩지는 커지고 재벌의 성곽은 높아만 갔다. 국제 통화기금(IMF)사태로 철웅성처럼 보이던 재벌의 성곽이 한갓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까지 재벌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박수 소리만 요란했을 뿐이다. 재벌의 팽창력은 한국 경제를 견인하는 엄청난 동력으로 미화되고, 재벌 총수의 초인적 능력을 과시한 자서전은 국민 필독서인 양 받들어졌다. 현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지나해 말 5대 재벌의 계열사 숫자는 IMF 사태가 일어나기 전인 96년보다 더 늘어나 있다. 환란의 주범으로 몰린 이후에도 재벌은 팽창의 관성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재벌 개혁이 너무 급진적으로 이루어져 걱정된 다는 감속론자들의 주장이 꼬리를 잇고 있다. 언제 한번 제대로 재벌 개혁의 열차를 출발시킨 적이 있던가. 늘 출발해야 한다는 위협적 경보만 요란했을 뿐 열차는 10여년 동안 정거장에 멈춰 있었다.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 특히 재벌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해소하지 않고는 한국 경제에 미래가 없다는 것이 IMF 사태의 교훈이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개혁이라는 과제를 감속론의 함정에 빠져 또 다시 잃지 않을까 경계할 일이다.

 재벌 개혁을 둘러싼 또 하나의 함정은 ‘인적 청산’에 관한 문제이다. 최근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 참모들은 재벌 총수의 책임 경영을 거론하며 ‘능력 없는 재벌 총수 퇴진’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황제나 다름 없는 재벌 총수의 전횡과 탈법 상속에 의한 세습적 족벌 경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총수와 그의 후계자가 무소불위로 의사 결정의 전권을 휘두르다가 기업은 물론 나라 살림을 거덜내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경고이다. 향후 재벌 정책이 재무 개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소유구조 조정 쪽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할 것임을 느끼게 한다. 재벌 총수에 대한 귀책 사유가 분명한 부분에 대해서는 퇴진이든 사재 출연이든 기업과 국가에 손해를 끼친 만큼 응분의 책임을 묻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소유와 경영을 확실히 분리해 선진형 기업지배구조를 만들어 가면 자연스럽게 ‘무능한 황제류’의 재벌 총수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소유가 곧 경영’인 한국식 기업 문화를 ‘경영은 전문가에게’로 변화시키면 해결될 문제이다. ‘인적 청산’ 이라는 충격적 용어를 구사해 반발 심리를 자극하는 것은 자충의 함정을 파는 짓이다.법과 제도를 통해 재벌을 전문화한 대기업으로, 총수의 독단 경영을 합리적인 전문인 경영 체제로 바꾸는 것, 그것이 재벌 개혁의 핵심이다. 개혁의 발목을 잡는 감속론이 함정이듯이 초법적 강제력을 연상케 하는 발상도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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