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벼슬 뒤에 긴 유랑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9.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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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최고 출세는‘법무장관’… 14년간 떠돌며‘설교’

이른바‘세계 4대 성인’으로 추앙되는 공자(B.C 551~479)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 창평 땅 추읍 (현 산등성 곡부현)에서 태어났다. 한나라 역사가인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 숙량홀과 어머니 안씨(顔氏)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 재능이 많고 제사 놀이를 즐기던 공자는 커서 창고지기 노릇도 했고, 귀족의 마굿간을 관리하며 가축을 기르기도 했다. 그는 세 살 때 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어려운 집안 형편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공자는 그같은 환경에서도 배우기를 좋아했는데, 이는 <논어(論語)에서‘나는 열다섯살 때 학문에 뜻을 두어다’는 자신의 말로도 확인 도니다. 공자 나이 열여섯에 그는 또 한번 불행을 당했다. 그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공자는 35세 때 제나라에 들어가 제경공(齊景公)을 만났다. 이때 제경공이 공자에게 두 번 정치에 대해 물었는데, 공자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자 그를 발탁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경공은 당시 제나라 재상이던 안 영의 반대에 부딪혀 태도를 바꾸었다. 관리로 진출하는 것이 좌절된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공자의 전성기는 50대 초반이다. 처음 노나라 중도재에 임명되었던 공자는 52세에 대사구(법무장관)로 승진하여 노나라의 치안과 사법 관원을 관장했다. 그는 재임3년동안 업무를 공정하게 처리해 명성을 얻었다. 또 그는 이 무렵 이웃 제나라와의 외교 협상에서도 대활약했다. 당시 노나라와 제나라는‘협곡회의’를 통해 동맹을 맺었다. 이때 공자는 기지와 용기로 동맹과 관련되 외교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 뒤부터 공자의 정치적 입지는 줄어들었다. 당시 노나라의 정치적 실권은 계손(季孫) · 숙손(叔孫) · 맹손(孟孫) 등 3경이 쥐고 있었는데, 공자는 이들과 불화를 빚은 것이다. 공자는 55세에 다시 노나라를 떠나 14년 동안 천하를 떠돌아 다니며 자신의‘정치적 이상’을 설교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는 유세 기간에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식량이 떨어져 제자가 굶주려 쓰러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노나라에 돌아온 뒤 공자는 교육과 고문헌 정리 작업에 힘을 쏟아, 죽기 전까지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춘추(春秋)> 등 6경을 편집했다. 역사서에는 그의 제자가 3천명에 이른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이 숫자보다 적다. 제자들 대부분은 귀국 이후 배출한 사람들이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일이 끊이지 않았던 혼란기였다. 그의 사상이‘질서’와‘조화’를 강조했던 것은 이같은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기원전 479년‘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다’라고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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