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은 한국인에게 희망인가, 절망인가
  • 장영희 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1999.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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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상 · 사회상 변화’여론조사…국민 대다수 “개인은 윤택해지고, 사회 불안 지속”예측

  한국인에게 새로운 밀레니엄은‘황금 시대’가 될 것인가. 이번 천년의 마지막 한가위인 9월24일은 새 천년을 100일도 남겨두지 않은‘D-99’. 한국인들은 2000년대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기를 기대하고 있는가. 자기의 삶이 담겨 있는 그릇인 한국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측하고 있는가.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굳이 매듭을 지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습관’을 갖고 있다. 2000년 1월1일이 1999년 12월32일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미래에는 무엇인가를 계기로 좋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는 한편 인간은 세기 말의 까닭 모를 어두운 그림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990년 후반에 중세 사람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듯이, 새 천년에 대한 인간의 정서는 불안과 기대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

  한국인들은 새 천년에 대해 불안보다는 희망과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 부설 마케팅연구소가 올 6월 13~59세 남녀 3천5백명에게‘2000년대 초기 10년 동안 우리나라의 제반 사회상과 생활상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조사한 결과를 최근 내놓으면서 밝혀진 사실이다. 한국인들은 정신적 · 물질적으로 윤택해져 자기 생활에 만족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점쳤다. 그러나 사회 변화에 대해서는 우울한 전망을 갖고 있었다. 정치 발전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으며, 빈부 격차 해소에는 더 부정적이었다. 사회 부조리와 범죄, 환경 문제에도 절망했다. 이런 예측들은 절망함으로써 애써 희망을 찾아내려는 반작용인지 모른다. 20세기의 어두운 그림자를 거두어내려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하지만‘나’라는 개인이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요인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냉소적 시각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든다. 참여 부재와 욕망 과잉. 이것이 초래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면책받을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사저널>은 제일기획 조사 결과를 뼈대로 새 천년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를 들여다보았다. <편집자>

崔寧宰 기자

“새 천년에 나는 행복해질 거야”
  김과장(35)은 올해 들어 달력에 밀레니엄‘개봉 박두 ㅇ일’이라고 적는 버릇이 생겼다. 그는 누가 보아도 평범한, 한국 사회의 평균적인 회사원이다. IMF 체제를 맞으면서 월급이 20% 깎이고 퇴출 공포에 사로잡힌 적도 두어 번 있지만,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가 크다. 낙천적 기질에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일까. 그는 말한다.“현재의 내 생활은 재미없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럴수록 새 천년이 밝을 것이라는 기대가 위안이 된다. 내가 살아 있을 때 천년 주기가 찾아온다는 것도 큰 행운 아닌가.”

  의외로 김과장 같은 한국인은 적지 않다. 제일기획의 조사에 따르면, 앞으로 정신적 ·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여가 · 취미 생활이 윤택해져 자기 생활에 만족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그렇다’는 긍정률이 40%를 훨씬 넘어‘그렇지 않다’는 부정률의 2배 이상이다.

  집안 분위기나 가족 관계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긍정률도 부정률보다 5배 이상 높았다. 스트레스가 더 줄어들 것이라는 항목에 동의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보다 더 적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되지 않을 정도다. 특히 젊은층일수록, 중류층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새 천년을 밝게 그렸다.

  이같은 예측은 금강기획 · LG에드 등 6개 광고 대행사가 공동 참여해 지난 5월 4천명을 대상으로 한 99 소비자 포르파일 연구(CPR) 조사 보고서의 결과와도 다르지 않다. 이 조사에 따르면‘새 천년에는 삶의 질이 향상될 것’과‘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라는 항목에 10명 가운데 6명 이상이 그렇게 되리라고 답했다.‘현재의 나 자신에게 만족한다’는 긍정률이 32.3%에 그쳐 현재의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낮은 것에 견주면 미래를 희망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정치 발전과 빈부 격차 해소에 시큰둥
  정치는 그 나물에 그밥? 정치 안정도 정치 수준 발전도 한국인들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확답을 피하거나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는 응답 비율이 훨씬 높았다. 민주주의 발전과 우리나라의 국제 위상이 높아질 것이냐는 질문에는 긍정률이 부정률보다 높았지만, 유보적 대답이 더 많아 전체적으로 밝게 보고 있다고 여기기 어려웠다.

  민주주의 발전 항목의 경우 지역별 편차가 크다는 점이 이채롭다. 광주에 사는 사람들의 긍정률은 44%인 데 비해 부산 · 대구 사람들은 각각 27,5%, 26.6%에 머물렀다. 2010년까지 남북 통일이 될 것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부정률이 훨씬 더 높은 것도 눈길을 끈다.

  빈부 격차 해소 같은 경제 관련 전망은 훨씬 비관적이었다. 특히 빈부 격차가 해소될 것이라는 항목에는 부정률이 긍정률보다 6배 이상 높았다.

  자기 자신은 경제적 여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사회 전체로는 소득 분배 상황이 악화하리라고 예측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앞의 예측을 희망 섞인 기대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IMF 체제를 통과하면서 한국인들은‘20 대 80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그러한 인식이 2000년대 전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절대 빈곤 문제는 세계은행(IBRD)이 21세기 최대 전염병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인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빈부 격차에 관한 세계은행이나 한국인의 위기 의식은 이를 시정하려는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범죄 · 부정 부패 없는 사회’에 비관적
 ‘클린 2000’이라는 구호가 난무하지만, 한국인들은 새 천년에 그런 세상이 오리라고 믿지 않는다. 절도 · 강도 같은 강력 범죄와 경제 범죄, 뇌물 수수 관행이 줄어들 것으로 보지 않는다. 줄어들 것이라는 견해보다 줄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이 4배 가까이 많았다. 박상기 교수(연세대 · 형법)는“공동체 부재와 부 양극화 현상 등으로 강력 범죄와 재산 관련 범죄가 늘면 늘었지 줄어들 공산이 희박하다”라고 말했다.

  사회 계층 간의 겨가가 줄어들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매우 부정적인 답변이 많은 것도 소득 분배 악화와 함께 이런 흉흉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생활 수준이 낮은 사람일수록 비관적으로 보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IMF 체제 이후 라이프 스타일의 10대 변화 가운데 하나로 신분 이동의 어려움을 꼽았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는 당대에서 상위 계층으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3대가 지나야 기대해 볼 정도로 신분 이동의 사다리가 까마득하게 길어질 것으로 내다보았다. 지역 감정 해소와 지역간 균형 발전 항목에는 긍적적 견해가 다소 앞섰지만 유보적 태도가 훨씬 많았다. 그런데 광주 지역 사람들이 다른 지역, 특히 부산 · 대구 지역 사람들보다 긍정률이 높은 것이 흥미롭다.

‘맑고 깨끗한 지구’를 믿지 않는다.
  미국 스탠퍼드 연구소는 2005년 5대 성장 산업 가운데 하나로 환경산업을 꼽았다. 환경 기술이 발달한 선진국의‘장삿속’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만큼 환경 오염이 심각하다는 경고이다. 물은 더 이상 마실 수 없을 만큼 질이 나빠졌고, 탁한 공기는 담배 몇갑을 피운 것과 진배없을 정도로 해롭다. 산더미처럼 쌓이는 폐기물은 인류의 마지막 물 저장고인 지하수원을 오염시키고 있다.

  생태주의가 21세기 철학의 핵심 화두로 떠오른 것도 환경 파괴에 따른 생태 위기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 네스 같은 노르웨이 철학자는 인간을 위해 다른 생명종을 파괴할 수 없다며‘인간은 지구의 암세포’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위험해 보일 만큼 혁명적 발상이지만, 인간이 다른 생명종을 위협하는 행태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인간을 위협한다. 이같은 현실에서 그의 독설은 심각한 경고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환경에 대한 위기 의식은 국제 기구나 환경 단체 등이 수없이 제기한 터여서 새로울 것이 없다. 한국인들의 대다수가 환경을 걱정하는 것 또한 당연해 보인다. 한국인 58.6%는 새 천년에 환경 오염이 지금보다 줄어들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서울 반포동에 사는 주부 김명희씨(36)는 생활 폐수를 줄이고 되도록이면 자기용을 덜 쓰려고 노력한다. 뒷세대에게 좋은 환경을 물려주어야한다는 거창한 생각보다는, 우선 자기의 아이들이 환경 오염에 심각히 노출되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교육의 질 향상에는 후한 점수
  상당수 교육 전문가들은 한국의 교육에 결코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다른 모양이다. 이번 조사에게 응답자의 46.3%는 2000년대에 교육의 질이 향상되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중립적인 견해가 만만치 않았고 부정적 견해 역시 꽤 있었지만, 일단 희망 썩인 관측을 하고 있다. 촌지가 줄어들 것이라는 항목에도 부정률보다 긍정률이 다소 높았다. 하지만 사교육(과외)이 줄어들 것이라는 데에는 부정적인 관측이 훨씬 더 많았다. 아무리 공교육의 질이 향상되어도 내 아이만은 더 좋은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못말리는 교육열 때문일까?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갈수록 대학 가기가 쉬워질 것이라고 보았다. 대학 수와 정원이 늘어나는 것보다 대입 수험생이 적게 늘어나는 상황이고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예측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취업 기회가 많을 것이라는 항목에는 긍정률이 다소 높았다. 대학 문턱을 넘었느냐보다 창의적이거나 아니냐가 중요하다는‘골드 칼라론’이 힘을 얻어 가는 상황이지만, 한국과 같은 뿌리 깊은 학력 위주 풍토가 수년 안에 자취를 감출지는 미지수다.


문화 예술과 복지에 큰 기대
  10명 가운데 절반의 한국인들은 우리 나라의 문화 예술 수준이 크게 높아질 것이며, 문화 예술 향유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10대의 기대 수준이 가장 높았지만, 연령별 편차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 결과는 한국인들이 자신의 삶에 윤기를 불어넣겠다는 적극적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영화 · 연극 · 전시회 · 콘서트 같은 문화 예술 행사에 얼마나 참여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면 공호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 사회에도 새로운 세기는 정치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문화에 의해 경계선이 그어질 것이라는 문명 비평가 새뮤얼 헌팅턴의 주장이 회자되고 있다. 산업으로서 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람도 많다. 월트 디즈니와 스필버그 감독이 이루어낸 문화 상품의 부가 가치에 자극된 탓이 클 것이다. 하지만 문화와 산업을 결합하기에 앞서 문화가 인간의 삶에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부터 성찰하는 것이 순서가 맞는 일이다. 문화 예산 1% 달성에 대한 환호성이 터져 나온 시점이라서 더욱 그렇다.

  98~99년 실업 예산이 대폭 늘어났지만, 여전히 예산 규모의 빈약성에서는 사회 복지 분야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그런데도 절반 가까운 한국인은 새 천년에 사회 복지 수준이 높아질 것이라고 본다. 국가 정책의 우선 순위가 사회 안전망 확충에 두어지고 있어 이런 기대는 실현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복지 수준은 그 나라의 인권 수준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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