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출신 김인서씨
  • 나권일 기자 ()
  • 승인 1999.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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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고향 땅에 나를 보내주오”

수구초심(首邱初心). 광주기독병원 3동 331호실에서 뇌졸중으로 투병하는 김국홍씨(73 · 광주시 산수동)는 추석을 앞둔 지금, 무엇보다도 고향 산천과 혈육이 그립다. 김씨가 태어나 자란 곳은 평안남도 덕천군 덕천면 무릉리. 주민등록증에는 김국흥으로 적혀 있지만 김씨의 원래 이름은 김인서(金仁瑞). 사상 전향을 거부한 이른바‘비전향 장기수’출신이다.

  김씨는 26년 11월 평안남도 덕천군(현재는 덕천시)에서 태어나 열아홉에 정인화씨(81년 사망)와 결혼해 딸 둘을 낳았다. 평안남도 민청 간부로 활동하던 김씨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0년 8월, 스물넷에 인민군을 따라 월남한 뒤 장흥 지역에서 조선노동당 전남도당학교 정치교양 강사로 일했다.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잡지 못하고 빨치산에 합류한 김씨는, 51년 12월 구례 화엄사 문수골에서 국군에 생포되었다.

  그 뒤 광주 포로수용소에서 전쟁 포로로 처우를 받으며 생활했으나, 52년 4월 고등군법회의 법정에서 20년형을 선고 받고 당시 광주형무소(지금의 광주교도소)에서 꼬박 20년을 복역했다. 만기 출소 뒤에도 사회안전법에 의해 청주보안감호소에 수감되었다가 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되고서야 출소했다. 김씨의 감옥 생활은 자그마치 33년 7개월.

  김씨는 출옥 뒤에 농장 포도밭을 지키는 고용인으로 일하기도 했고, 2년 동안 골재 채취장에서 인부 노릇을 하기도 했다. 뇌졸증으로 쓰러지기 전까지는 지인의 도움으로 조선대 구내 서점 직원으로 근무했다. 그때가 김씨가 남한에서 보낸 가장 편안했던 나날이었다.

  김인서씨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은 96년 7월. 뇌출혈로 왼쪽 팔다리가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지하는 처지가 되었다. 뇌졸증 후유증에다 만성 C형 간염과 역류성 식도염, 심장질환과 신경통까지 겹친 노인성 질환으로 지난해 9월부터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기를 세 차례, 화장실 출입조차 지팡이에 의지해 숨을 몰아가며 할 정도이지만 도와 줄 사람 하나 없이 목욕이나 세탁, 병상의 시트를 가는 일까지 모두 같은 병실 보호자들의 손에 의지하고 있다. 정부로부터 매달 15만원씩 받는 거택보호자인 김인서씨는 병원 치료비 역시 자신이 신도로 있는 광주무진교회(강신석 목사)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

  김인서씨와 같은 비전향 장기수들은 출소 뒤에도 보안관찰법에 따라 제약을 받는다. 거주지를 옮기거나 3일이 넘는 여행을 떠날 때는 관계 기관에 신고해야 한다. 장기수들끼리의 만남과 회합도 금지되어 있다. 표현 · 집회 · 여행 · 사생활의 자유에 실질적인 인권 침해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간절한 김씨의 바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김인서씨의 이러한 바람은 북한 송환 운동이 좌절되자 더욱 간절한‘마지막 소망’으로 바뀌었다. 김인서씨 송환운동이 벌어진 것은 6년 전인 93년. 이인모 노인을 송환해 해빙 분위기가 조성되자,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김재열 목사와 불교 인권위원회 진 관 스님 등 종교계와 인권단체들이‘김인서 · 함세환 · 김영태 송환 추진 본부’를 구성해 적십자사와 통일원에 북환 송환을 탄원했다. 그러나 이 탄원은 통일원이 외면해 좌절되었다.

북한의 딸, 아버지 송환 간절히 원해
  김인서씨는 96년 6월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앞으로 직접 탄원서를 제출했다.‘나는 30년 이상을 수감되어 있을 만큼 파렴치한 죄인이 아니다. 노동할 기력도 없는 병든 노인을 고향으로 보내, 남은 여생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전쟁 포로를 교환할 때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갔어야 할 사람을 군사 재판으로 징역을 살게 하고, 지금까지 붙잡아 놓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김인서씨 등 세 사람은 현재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아 한국 시민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전쟁 포로로 보기 어렵다’며 송환을 반대했다. 한때 납북된 대한항공 여객기 승객과 동진호 선원 송환을 조건으로 긍정적으로 송환을 검토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93년 3월, 이인모 노인을 송환했다가 북한의 체제 선전에 이용만 당했다는 국내 보수 세력들의 강한 반대 때문이었다.

  현재 김씨와 같은 비전향 장기수는 국가정책상 제3국을 통해서 북한 주민과 만나는 것도 금지되고, 통신만 허용된다. 김씨는 현재 제 3국인 일본이나 독일을 통해 두 딸이 보낸 편지와 사진을 보면서 겨우 이산의 아픔을 달래고 있다.

  평양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인서씨의 혈육은 할머니가 된 맏딸 김화심씨(53)와 둘째딸 김정심씨(49) 그리고 여동생 김봉숙 · 김봉선 자매, 특히 김씨의 맏딸 김화삼씨는 평양 외국어대학 강좌장으로 근무하며 아버지 김인서씨 송환에 앞장서고 있다. 김화심씨는 수차례 북한적십자사를 통해 아버지 송환을 요구했고, 최근에는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탄원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화심씨는‘송환추진본부’에 보낸 편지를 통해‘70세 고령인 병약한 노인이 문 밖 출입도 못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다. 살아 생전에 서로 만나 한지붕 아래서 오붓이 살고 싶은 것은 아버지와 우리 가족 모두의 간절한 마음이다’라며 김인서씨 송환을 간청했다.

  남북이 이데올로기로 분단되고, 특수한 안보 여건이 존재하는 나라.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으로 잡혀 사상 전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33년 넘게 감옥에서 고생하고 반국가 사범이 된 김인서씨는“출옥한 뒤 10년 동안이나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지만 죽기 전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오직 나를 지탱하는 힘이다”라며 딸들이 보내온 편지와 사진을 들여다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김인서씨와 같은 처지인 비전향 출수 장기수들은 대부분 한국전쟁을 전후해 체포되어 30여 년간 복역한 뒤 남한 땅에서 외롭고 쓸쓸한 삶은 살아가고 있다. 특히 김인서 · 함세환 · 김영태 씨는 고향으로 송환되는 것이 현재까지도 유일하고 간절한 소망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무친한 타향에서 고독하게 말년을 보내고 있는 최고령‘전쟁 포로’김인서씨. 죽기 전에 혈육의 보살핌을 받고 싶다는 그의 귀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풀리지 않는 남북 관계와 완강한 냉전 이데올로기이다.

광주· 羅權一 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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