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대란 피했지만 ‘난제’ 산적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9.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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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장안정대책으로 급한 불 꺼... 책임 소재 규명 · (주) 대우 처리에 어려움

‘데드라인’은 11월 10일.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금융 시장이 ‘사선’을 넘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투신사 고객들이 대우채를 환매해 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하면, 투신사가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고 금융 시장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지난 4일 정부가 내놓은 금융 시장 안정 대책은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한 최후의 고육책이었다. 정책의 핵심은 두 가지. 첫째는, 투신사에 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한국투신 · 대한투신 · 서울보증보험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고 △투신사가 보유한 대우 무보증 채권을 성업공사를 통해 사들이며 △채권안정기금과 시중 은행을 통해 투신사가 보유한 채권을 무제한 사들이고 △투기 등급 채권(신용 등급 BB+ 이하)에 집중 투자하는 하이일드(고수익) 펀드를 발매해, 대우채 환매로 빠져나가는 돈을 다시 투신권으로 유입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금융 시장 불안의 주범으로 꼽히는 투신사가 유동성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둘째로, 정부는 대우그룹 12개 계열사의 부실 규모를 적나라하게 공개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 대우그룹 계열사에 대한 실사 작업을 단행했다. 9월 20일께부터 시작해서 4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우 감사한 회계법인들 부실 감사 의혹
보통 워크아웃을 이해 실사할 때 걸리는 기간은 짧게는 2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정도 걸린다. 그런데 재계 2위 재벌 실사를 40일 해치운 것이다. 그것은 11월 대란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대우채 환매 비율이 80%로 올라가는 11월 10일 이전에 대우 사태의 진상을 밝혀, 시장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대우 사태가 터진 지 4개월 만에 밝혀진 대우 계열사의 부실 정도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도표 참조). 지난 6월말 현재 14조1천억원이었던 12개 계열사의 순 자산 가치(자산-부채)가, 8월 말을 기준으로 한 실사 결과에서는 -25조6천억원으로 바뀌었다. 2개월 사이에 순 자산 가치가 39조7천억원이나 줄어든 것이다.

순 자산 가치가 가장 많이 줄어든 계열사는 (주)대우이다. 산동회계법인이 감사한 자료에 따르면, (주)대우의 순 자산 가치는 2조 6천억원이었다. 그런데 삼일회계법인이 실사한 결과 -12조5천억원으로 자본 잠식 상태에 빠졌다. 2개월 만에 추가 부실이 17조1천억원이나 되었던 것이다. 이밖에 대우자동차의 순 자산 가치는 -5조7천억원, 대우전자는-2조7천억원으로 줄어들었다. 이들 3개 사의 자본 잠식 규모(23조원)가 계열사 전체 자본 잠식 규모의 90%를 차지한다.

최근 들어 회계 법인의 부실 감사 의혹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개월 만에 부실 규모가 이처럼 커졌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결국 기업이 회계 분식을 했거나, 회계법인이 감사를 잘못했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가장 곤욕을 치르는 곳이 산동 회계법인이다. 산동은 (주)대우 · 대우중공업 · 대우자동차판매 · 다이너스카드 · 쌍용자동차를 회계 감사했고, 그룹 전체의 연결 재무제표도 작성했다. 그 때문에 ‘빅5’ 회계법인이면서도 실사 기관 선정에서 탈락했고, 지금은 부실 감사 의혹까지 받고 있다.

업계에서는 ‘산동이 제2의 청운이 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조심스럽게 흘러나온다. 청운회계법인은 기아자동차의 회계 감사를 맡았던 랭킹 7위 업체였다. 그런데 기아가 장기간에 걸쳐 회계 분식한 것을 찾아내는 데 실패해 결국 청산의 길을 걸었다.

“대우 사태 책임 소재 가려야 한다”
산동은 이런 의혹을 일고할 가치도 없다고 일축한다. 옥민석 상무이사는 산동의 감사 결과와 삼일의 실사 결과가 크게 다른 것이 두 가지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는 실사 기관이 지나치게 보수적인 잣대를 들이댔다는 것이다(78쪽 인터뷰 참조).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감사 기준과 실사 기준이 다르다는 점이다. 회계 감사는 기업이 영업 활동을 정상으로 계속한다는 계속 기업(going concern)을 전제로 한다. 반명 워크아웃을 위한 실사는 채권자가 대출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기업 가치 또는 청산 가치를 산정하는 데 목적이 있다. 동네 옷가게를 예로 들자. 가게가 정상 운영될 경우에는 모든 것을 제값 받고 팔 수 있지만, 일단 망하고 나면 모든 것이 쓰레기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전자가 감사 기준이고, 후자가 실사 기준인 것이다.

산동은 (주)대우의 경우도 똑같다고 말한다. 기업 회계 기준에 따르면, 관계사 주식 · 출자금 등은 자기 회사 재무제표에 제대로 반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사 기준에 따르면‘0원’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관계사에 대한 매출 채권, 선급비용 · 무형자산도 마찬가지이다. 회계 기준에서는 모두 제값을 쳐주지만, 실사 기준에는 ‘0원’으로 처리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실사 기준에 따를 경우 손실이 커질 수밖에 없다.

금융감독원도 이 점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회계 분식이나 부실 감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금감원 신용감독국 한백현 팀장은 “회계 분식이나 오류가 있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실사 결과가 나오는 즉시 감리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11월 말에 최종 실사 결과가 나오면 즉시 감리를 실시해서 책임 소재를 가리겠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사실 여타 회계법인도 똑같이 안고 있다. 안진회계법인은 대우전자 · 대우통신을 감사했고, 안건은 대우자동차, 영화는 대우전자부품을 감사했다(도표 참조). 예외가 있다면 삼일회계법인인데, 삼일도 대우증권 · 대우개발(힐튼호텔)을 감사한 기관으로 대우와 인연을 맺고 있다. ‘빅5’ 가운데 대우 사태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회계법인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불안해 한다. 한 회계법인 관계자는 “대우 부실을 둘러싸고 희생양을 찾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실로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말했다. 반면 한국신용정보 오광희 상무는 오히려 책임 소재를 따지는 일에 소홀하다고 문제삼는다. “대우 사태는 국민 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준 사건이다. 처벌은 나중에 하더라도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철저히 가릴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주)대우 처리문제이다. 당초 정부와 채권단은 워크아웃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런데 해외 채권단이 비협조적인 자세를 고수하자, 법정관리를 적극 검토하겠다는 쪽으로 선회했다. 실사를 맡았던 삼일회계법인도 (주)대우의 부실 규모가 너무나 크고, 청산 가치와 존속 가치 간에 큰 차익 없다는 점을 들어 법정관리도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대우 법정관리로 넘어가면 수출 타격
대우측으로서는 당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조조정본부의 한 관계자는 “워크아웃에 참여하지 않은 채 채권단 계획에 대해 거부권을 달라고 하는 해외 채권단을 겨냥한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하면서도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주)대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역 부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경제에서 무시 못 할 비중을 차지해 왔다. 지난해의 경우 (주)대우의 수출액은 1백71억 달러로, 한국의 전체 수출에서 13.3%를 차지했다. 70여 나라에서 한국 1위의 수출기업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이들 지역은 국내 기업의 수출 기반이 취약한 지역이라는 점 때문에 그 중요성이 더 크다.

무역 업체를 법정관리에 넣는 것도 생각해 볼 대목이다. 사실 무역업체는 제조업체와 달리 이미지를 생명처럼 여긴다. 이런 회사가 법정관리로 넘어가면 수출 활동에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 뻔하다. 그런데도 법정관리가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은, 엄청난 부실 규모와 해외 채권단의 무리한 요구 때문이다.

대우 사태 해결을 지연시키는 것은 국내 채권단도 마찬가지이다. 전문가들은 채권단의 운영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라고 입을 모으다. 한 가지 사항을 합의하려면 채권 액수 기준으로 75%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고, 여기에 미달할 경우에는 기업구조조정위원회의 조정을 받아야 한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다 보면 배가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2년 전 기아 사태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사태가 발생한 초기에 기아의 차입금은 8조원, 부실 규모는 2조 3천억원이었다. 그런데 사태가 2년 가까이 장기화하면서 손실 액수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 손실이 1차적으로 채권단 몫으로 떨어졌지만, 결국은 국민 혈세로 메워야 했다.

이런 악습이 되풀이도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시간과의 전쟁’을 강조한다. 기아 사태처럼 1~2년 정도 허송세월하면 15조원 정도의 추가 부실이 발생하는 것은 우습다는 것이다. 오광희 상무는 “대우 문제는 이제 겨우 시작이다. 지금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희생을 치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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