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벌 경영’ 날개 꺾이다/조중훈 회장 3부자 기소... 거액 세금 추징 ‘철퇴’
  • 장영희 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1999.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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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진그룹 탈세 사건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에게 11월 10일은 ‘액일’이 틀림없다. 95년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대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았던 그는 꼭 4년 만에 다시 불려나왔다. 그는 한 기자로부터 ‘검찰 수사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 기자를 잠시 뚫어지게 쳐다보던 조회장은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재계 서열(자산 기준) 6위인 한진그룹이 창사 54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주력 기업인 대한항공을 거느리고 있는 후계자 조양호 회장이 조세 포탈과 횡령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을 뿐더러, 한진의 간판 얼굴인 창업자 조중훈 회장과 셋째 아들 조수호 한진해운 사장마저 불구속 기소되었기 때문이다. 오너 3부자 사법 처리 소식이 전해진 11월 11일 한진그룹에서는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나 하는 자조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기업 이미지와 대외 신인ㄷ 추락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속내는 다르지만, 일단 한진그룹은 오너와 기업을 분리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기업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진그룹 경영진은 이원성 전 대검차장과 안강민 전 서울지검장 같은 호화판 변호인단을 구성해 재판에 대비하면서 이번 사태에 따른 파장을 탐문하는 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진그룹 처지에서 최대 현안은 집채를 집어삼킬 만큼 메가톤급인 세금 해일을 집채가 떠내려가지 않게 하면서 제대로 막아내느냐에 있다. 무려 4천1백97억원이나 세금을 두들겨 맞은 대한항공을 비롯해 한진그룹 4개 사가 내야 할 추징 세액은 4천4백49억원(조세 포탈에 따른 벌금은 제외). 과연 한진그룹은 이 막대한 추징금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재계, 조회장 은퇴 → 사재 출연 점쳐
우선 비관론. 올 6월 말 현재 19개 계열사의 순이익은 3천7백억원(매출액 5조8천억원)이다. 이것도 환율 변동에 따른 환차익에 힘입은 것이어서 실제 영업 이익은 적자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추징 세액의 94%를 부담해야 하는 대한항공의 영업 상황이 경기 회복에 힘입어 크게 호전되고 있으며, 설사 벌어들인 돈이 부족하더라도 족히 대단 1억 달러가 넘는 항공기를 매각할 수 있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관측도 나온다. 물론 대한항공의 올해 순이익이 적자로 전환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상반기 순이익 2천3백억원).

한진은 일단 세금을 내되 추징금은 최대한 줄이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이에 대해 한진그룹은 국세청을 의식한 듯 구체적인 설명을 피했지만, 국세심판소에 이의 신청을 하고 나아가 행정 소송도 불사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미 대한항공을 뺀 한진해운 등 3개 계열사에는 국세청으로부터 11월 말까지 4백억원대 세금을 내라는 고지서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한진이 아직 본격적인 세금 격랑에 휘말린 것은 아니다. 국세청이 대한항공에 대한 징세권을 발동하지 않은 것이다.(11월 15일 현재). 이에 대해 서울 지방 국세청 조사 3국의 한 관계자는 확인해 주기를 거부했지만, 대한항공이 아일랜드 더블린에 세운 칼프(KALF)사 관련 혐의를 둘러싸고 논란이 비등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칼프 사는 97년 6월 대한항공이 한국과 아일랜드 양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정당하게 설립한 특수 목적 법인이다”라며, 항공기를 사거나 팔 때 외화를 빼돌리는 창구로 활용되었다는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또 탈세 혹은 외화 도피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항변했다. 칼프와 관련된 모든 거래는 재경부의 감독을 받고, 결산 내용이 한국은행에 보고되며, 수익이 모두 대한항공에 송금되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도 조양호 회장 구속 영장을 청구할 때 이 부분을 혐의사실에서 제외했다. 따라서 검찰이 보강 수사 중인 칼프 관련 혐의가 어떻게 귀결되느냐에 따라 추징 세액이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대한항공에만 영향이 있을 뿐 조회장 일가가 내야 할 세금과는 거의 무간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회장 일가는 적어도 6백59억원(벌금 제외)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증권 시장에서는 지난 10월 15일부터 최근까지 조회장 일가가 9천~만원대 한진해운 주식을 백만 주 이상 팔아치운 것도 이 때문이 아니냐 하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설사 정부로부터 손떼라는 식의 압력이 없더라도 추징금을 마련하려면 지분을 팔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대주주로서 입지를 잃을 수도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5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미 세무 조사 결과가 발표될 때부터 재계는 조회장 일가를 향해 소유 주식과 경영권을 내놓으라는 신호로 해석했다”라고 지적했다. 때마침 재계에서는 조중훈 회장이 완전히 은퇴하고 사재를 출연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다.

올 4월 대한항공의 잇단 사고가 부른 경영 위기에도 끄떡없이 버텨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던 조중훈 회장이 어쩌다가 이런 처지에 내몰리게 되었을까. 재계 관계자들은 조회장 일가가 기업 자금을 마치 자기 돈인 것처럼 유용한 행위 자체가 죄질이 나쁜 범죄이지만, 현 정부는 족벌 경영이 탈세와 횡령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보고 여기에 철퇴를 내린 것이라고 분석한다.

슬하에 4남1녀를 둔 조회장은 92~94년 그룹 사업 부문을 4등분 해 사형제 분할 체제를 구축했다. 장남인 양호씨는 항공 부문, 차남 남호씨는 중공업 부문, 삼남 수호씨는 해운 부문, 사남 정호씨는 금융 부문을 맡고 있는 것이다(위 가계도 참조). 한진그룹은 조회장 일가가 대한항공 · 한진해운 · (주)한진 · 한진중공업 · 동양화재해상보험 등 주요 계열사의 대주주로 있으면서 다른 소규모 계열사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인데, 이것은 다른 재벌들과 다를 것이 없다.

“현 정권과의 악연 작용” 해석도
그런데 왜 유독 한진만 철퇴를 맞았을까. 이런 의문에 재계 관계자들은 한진과 현 정권의 ‘악연’을 거론한다. 조회장은 92년과 97년 대선에서 현 정부에 거의 ‘보험료’를 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상 야당에도 여당의 10% 정도 정치 자금을 주었던 다른 재벌과 달리 한진은 완전히 여당에 몸을 실어 미운 털이 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 보복 어쩌고 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이보다 조회장 추락을 재촉한 배경으로 김대통령과의 오랜 악연을 드는 이들도 있다. 조회장은 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직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에게 사건 무마비로 3억 엔을 건넸다. 이 사실은 <유에스아시안 뉴스 서비스> 문명자 주필이 최근 낸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 폭로했다. 문주필은 이로써 조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실이 이번 한진 사태와 어떤 연결 고리를 갖는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대통령에게 조회장이 껄끄러운 존재인 것은 틀림없다.

조회장은 25세 때인 45년 트럭 1대로 한진운수라는 회사를 차렸다. 베트남 전쟁은 조회장에게 사업가로 클 계기가 되었다. 독점 운송 계약권을 따낸 조회장은 66~71년 1억5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미국 군정 때 다져놓은 인맥과 박정권의 비호 덕분이었다. 68년 대한항공의 전신인 대한항공공사, 87년 한진해운 전신인 대한선주를 인수한 것은 조회장이 국내 최대 수송 · 물류 기업군의 오너로 탄생하는 데 결정적 디딤돌이 되었다. 현재 한진그룹의 수송 · 물류 기업 비중(전업도)은 68%.

한진 사태는 조만간 정치권과 관계에도 불똥이 튈 전망이다. 검찰로서도 비자금 사용처를 수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의 한 박사는 “이번 사태는 정경 유착과 족벌 경영이라는 한국 재벌가의 전근대적 행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라면서, 본질적으로 이번 사태는 조회장 일가의 위기이지 한진그룹의 위기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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