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몇 살야? 주민등록증 꺼내 봐”
  • 이성욱(문화 평론가) ()
  • 승인 1999.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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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비평

얼굴만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다. 그 분이 근무하는 대학교에 강의하러 가면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게 된다. 그러면 그 분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어휴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눈꼬리가 밑으로 내려가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무리하는 그 분의 응답에는 심지어 공대하는 느낌조차 들어 송구스럽기까지 하다. 지난주에도 복도에서 마주쳤다. 인사를 먼저 하자 그 분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반응한다. “응, 그래. 잘 지내?” 왠 반말! 처음에는 당황할밖에.하지만 나는 금방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아채고 평소보다 더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예,잘 지냅니다.” 이어 발걸음을 옮기면서 하시는 그 분의 말씀 “또 보자!”

 그 분의 인사가 존대에서 하대로 바뀐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그 분은 나를 잘 모른다. 다시 말해 얼굴만 이러저러한 데서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지난 주 내게 반말을 한 사단은 내 차림새에서 그 까닭이 나온다. 어깨에는 학생들이 메고 다니는 책가방용 배낭을 메고 거기다 운동화에 옷은 두꺼운 스웨터 하나로 마감했으니 그 분의 감각으로는 내가 도시 선생으로 상상되지 않았던 것이다. 영판 학생처럼 보였을 뿐이다.

 이런 경우를 하도 많이 겪어 보아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말하자면 그 분은 많은 사람의 경우처럼 머리 속에 화석처럼 들러붙어 있는 관습적 사고에 따랐을 뿐이다. 그 분을 비롯한 믾은 이들의 익숙한 사고법에 의하면, 책가방용 배낭은 어린 학생이 메는 것이고 어른이나 선생은 손가방 정도는 들어야 한다. 또 운동화는 학생이 신는 것, 어른들은 구두를 신어야 한다. 요컨대 세대별 차림새의 견본이 그들에게는 요지부동하게 심어져 있는 셈이다.

 경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사로운 일 하나를 더 보태면, 작년에 택시 운전사와 파출소를 방문한 일이 있다. 운전사는 손님인 나에게 반말을 했고, 그 날 따라 상당히 민감했던 나는, 운전사의 그런 불손한 태도에 격분해 예기치 않게 다소의 완력을 썼던 모양이다. 나에게 약간의 신체적 피해(?)를 본 운전사는 뜻밖으 수입을 잡을 기회라고 여겼는지, 파출소행을 주장했다. 파출소에서 운전사는  기세등등했다. “나이도 어린 놈이 말이야, 어디서 함부로….” 장유유서 사회임을 잊지 않고 있던 그로서는,어른에게 무례하게 대든 ‘어린놈’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혼내 주어야 할 상황이었다.그것이 어른의 도리이자 의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각자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대조하니 유감스럽게도 내가 한 살이 더 많았다. 경찰이 운전사에게 왜 손님에게 반말을 하고 불손하게 그랬느냐 하니, 대답은 이랬다. “배낭을 메고 있으니 학생인 줄 알았지, 누가 이렇게 나이 많은 줄 알았나….”

나이 적은 사람에게는 반말을 해도 된다는 ‘신념’
 나는 지금 내가 동안임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나의 사사로운 경험에 얽혀 있는 녹록치 않은 화두들이다. 운전사에게는 누구도 교정해 주지 못할 완강한 신념이 있었다. 이만저만한 나이에는 마땅히 이러저러한 차림새여야 하고,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는 반말을 해도 된다는, 다시 말해 나이는 인간 관계에서 나름의 권리를 확증해 주는 지표가 된다는 것 등이다. 나이와 옷차림의 관계, 그리고 나이가 권리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런 확고한 믿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나, 우리는 그것을 너무 자면한 진실처럼 여기고 있다. 하지만 신념의 뒤틀린 세 가지 종류인 미신·맹신·광신은 사태를 너무 자명하게 해석하는 데에서 온다는 점을 새겨들을 만하다.

 여하튼 내가 겪은 일들은 한국 사회의 숙변 같은 문제들이었다. 나이와 옷차림의 관계에 대한 고정된 감각과 생각의 정화는 단지 그 관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학국 사회의 전반적 자질에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해 사고의 탄력과 감각의 신축성이 우리 사회에서는 무척이나 부족하다는 것의 응축이다. 나이에 대한 우리의 생각 역시 다르지 않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존대해야 한다는 격률은 나이 그 자체가 존중 받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나이에 묻어 있는 세월고 경험의 지혜에 대한 존중의 권려이다. 막되어 먹은 상황을 스스로 벌여놓고 드잡이를 하면서 노상“너 몇 살이냐?이 자식이,마빡에 피도 안마른 놈이”라는 말법이 반복되는 경우라면 나이에 대한 존중의 맥락은 이미 개가 물어 간지 오래이다.

이성욱(문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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