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성공 거둔 이회창의 정치력
  • 김종민 기자 ()
  • 승인 1999.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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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건 정국 통해 야당 지도자 입지 굳혀 … 참신한 이미지는 훼손

지난해 8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총재로 선출된 직후 핵심 측근인 윤여준 여의도연구소장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DJ에게 기대하는 게 있다. 그 양반은 책을 본 사람이고 사선도 넘은 사람 아니냐. 나이도 있고 재선 욕심이 있을 것도 아니니 뭔가 초월하는 게 있을 거다. DJ와 협력해서 제대로 정치를 해보고 싶다.”

그 후 1년 3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이 총재는 총풍 · 세풍 등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장외 투쟁가지 벌이면서 대여 강경 투쟁을 앞장서 지휘하기도 했다. 정치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이 총재의 희망은 실현되고 있는가. 이에 대해 윤소장은 말한다. “이 총재가 요즘 고민이 많다. 본인의 원래 이미지와 달리 3김을 닮아 간다는 비판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 총재가 새로운 이미지를 쌓지 못하도록 여권이 몰아붙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젠 변화를 모색할 때가 되었다.” 여권의 ‘이회창 죽이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하지만, 지금 모습은 아무래도 불만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불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총재 본인이나 측근들은 최근 언론 문건 파동을 거치면서 강한 자신감을 얻었다. “이번 투쟁을 통해 수세에서 벗어나 집권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의 힘을 보여줬다. 또 그 과정에서 당의 활력과 결속력이 높아졌다.” 금종래 비서실 차장의 얘기다. 지난해부터 불어 닥친 총풍 · 세풍으로 한때 한나라당과 이 총재의 존립 자체가 걱정스러웠던 때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큰 변화다.

성급한 사람들은 벌써 차기 대권과 연결하기도 한다. 이 총재가 이번 투쟁 과정에서 DJ에게 정면으로 맞서면서 단일 야당의 지도자로 확실하게 부각되었기 때문에 임기 말 내각제 시도를 저지하고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차기 대권을 낙관할 수 있다고 앞서가기도 한다.

측근들 “당 장악력 확고해 반발 세력 거의 없다”
특히 이 총재 측이 강조하는 것은 이 총재의 당내 장악력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총풍 · 세풍에 시달릴 때만 해도 각 계파 보스의 견제가 이 총재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했고, 의원들은 총재 옆에 잘 가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YS의 민주산악회 문제까지 해결되었기 때문에 당내에서 이 총재의 지도력에 반발하는 세력은 거의 없어 보인다. ‘보스는 있는데 계파는 없다’는 말도 있다. 수원 집회에 의원이 백명 넘게 참석한 것도 이 총재의 당 장악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이부영 한나라당 총무는 이러한 ‘성과’가 이 총재의 정치력 덕분이라고 평가한다. “자금과 확실한 지역 기반, 별다른 계보도 없는 상태에서 혈투를 벌여 여기까지 왔다. (이런 상황은) 이 총재의 정치력을 빼면 설명이 안 된다.” 금종래 비서실 차장은 언론 문건 투쟁이 성공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총재의 정치력에서 찾는다. “만일 이 총재가 싸움에서 한 발짝 물러서 머뭇거렸다면 단순한 1회성 폭로로 끝났을 것이다. 정형근 의원의 폭로에 힘을 실어 주면서 전면에 나선 이 총재의 정치적 판단은 정확했다.”

이 총재와 가까운 인사들의 평가를 100%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그가 정치 신인으로서는 기대 이상의 돌파력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정치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고흥길 특보는 이렇게 설명한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 총재의 참신성과 가능성이다. 3김 이후 정치 지도자로서 이 총재의 잠재적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점이 힘의 원천이다. 총재 경선에서 승리한 원인도 거기에 있고, 당의 구심력도 거기서 생긴다.” 물론 이들은 이 총재에 대한 여권의 압박이 한나라당 내부를 단합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인정한다. 역설적이지만 이 총재가 지도력을 확립하는데 기여한 일등 공신은 DJ라는 말도 한다.

이회창의 정치력에 대한 비판들
그러나 이 총재의 정치력을 비판적으로 보는 당내 흐름도 있다. 그가 자력으로 당을 이끌어 왔다기보다는 정부 · 여당의 잘못으로 반사 이익을 얻었을 뿐이라는 평가다. 우선, 대여 투쟁에 대한 평가에서 이 총재 측과는 사뭇 다르다. 수도권 한 초선 의원은 이번 언론 문건 투쟁에 대해 “왜 싸웠는지 모르겠다. 목소리는 높았는데 얻은 게 별로 없다”라고 평가한다. 한 비주류 중진 의원은 비슷한 관점에서 비판적이다. “초 · 재선 의원들에게 둘러싸여 너무 강경 일변도로 나갔다. 장기적으로 보면 국민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특히 정치 경험이 많은 의원들은 이 총재가 밀어부틸 때와 물러설 때를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지난 10월 도 · 감청 문제가 불거졌을 때 제대로 싸우지 못했던 것을 전자의 사례로, 정형근 의원의 일부 무리한 발언을 빨리 털고 가지 못한 것을 후자의 사례로 든다. 특히 정의원 문제는 마냥 업혀만 갈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대목은 빨리 조처해서 쟁점이 분산되지 않도록 했어야 한다는 얘기다.

당내 지도력 문제에서도 비판적인 얘기가 없지 않다. 비판적인 의원들은 이 초재가 잘해서가 아니라 내년 총선 때문에 말을 안 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박종웅 의원은 민주산악회 문제에 여전히 불만이 많다. “YS가 민산 재건을 유보했으면 당연히 이 총재가 YS에게 화답하는 것이 도리 아니냐. DJ는 대권을 위해 JP와도 손을 잡았다. 하물며 이 총재를 정치인으로 만든 YS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할 이유가 뭐냐.”

이 총재가 YS와의 관계에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다음 총선에서 그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역시 비주류인 이재오 의원도 비판적이다. “당내 장악력이 높아진 게 아니라 무관심층이 높아졌다. 총선이 걸려 있으니까 그 이전에 당내 문제로 왈가왈부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일 뿐이다.”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도 있다. 지도부가 판단력은 부족하고 고집은 세서 의원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의원총회에서 지도부의 입장과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고 비판을 귀찮아하기 때문에 의원들이 불만은 있지만 말을 안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부 불만은 크든 작든 앞으로 총선 공천과정에서 밖으로 불거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렇듯 이 총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기는 하지만 역시 전체적으로 보면 이번 언론 문건 투쟁을 거치면서 이 총재의 당내 장악력이 매우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이 총재를 불안스럽게 지켜봤다. 주저앉을 수도 있었는데 당을 잘 이끌어 왔다. 여러 어려움을 극복해 온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당내에 폭넓게 형성되어 있다.” 비교적 객관적인 처지인 서 훈 의원의 말이다.

이러한 당내 분위기에 힘입어 최근 이 총재의 고민은 총선 쪽으로 성큼 다가서 있다. 내년 총선에서 선전하면 지난 1년여의 ‘진흙 밭 행군’도 보상받는 셈이고, 차기 대권에도 파란불이 켜진다. 내년 총선은 이 총재의 정치적 장래에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이 총재와 한나라당이 관심을 기울여 온 곳은 역시 영남권이다. 영남권에 넘쳐흐르고 있는 ‘반DJ 정서’의 물꼬를 한나라당 쪽으로 틀어 놓는 것이 이 총재 측의 제1 관심사였다. 그동안 수차례 장외 집회를 통해 공도 많이 들였다. 영남권 이상 기류의 가장 큰 복병이던 YS와 민산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서 기대치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대구 · 경북 지역의 경우 자민련 변수, 신당 변수 등이 있지만 반DJ 정서가 워낙 강해 ‘꿩 잡는 매’에게 표를 몰아 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대구 · 경북 의원들도 몇 달 전에 비해 분위기가 아주 좋아졌다고 얘기한다. 한나라당 핵심 인사들은 소선거구제만 관철하면 영남권 석권이 무난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문제는 수도권이다 내년 총선 역시 지역 구도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호남 · 충청 · 영남은 큰 변수가 아니다. 승부는 수도권에서 날 가능성이 높다. 이 총재 진영 내부에서도 소수 의견이지만 수도권 전략을 걱정하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동안 너무 영남 전략에 치우친 것 아닌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수도권 유권자들은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한나라당에 비판적이다.”

서울에 지역구를 둔 한 의원도 같은 의견이다. “장외 집회를 하려면 수도권에서 먼저 하고 마무리 순서로 영남에 내려가는 게 맞다. 만만한 영남에 너무 의존하다 보니까 한나라당이 영남당으로 오해 받기도 한다.” 고흥길 특보도 그동안의 과정은 영남 기반을 다지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생각하지만 앞으로는 수도권 전략이 핵심이라는 데 동의한다.

서울지역 한 지구당위원장은 이렇게 분석한다. “내년 총선에서는 지역 변수와 밀레니엄 변수가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수도권에서는 밀레니엄 변수가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새 천년을 맞아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유권자들의 심리가 수도권 선거를 좌우할 것이라는 얘기다. DJ의 신당 역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이에 맞서 수도권에서 승리를 이끌 수 있는 힘이 이 총재에게 있느냐 하는 점이 내년 총선의 관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여권은 신당 추진을 통해 카드를 던졌다. 이 총재의 정치력도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 위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최근 이 총재 측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이원창 특보는 이 총재의 최근 상황에 대해 “이제 한숨 돌렸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새로운 면모를 보여야 할 때가 됐다. 국민의 기대가 아직 남아 있을 때 본격적으로 진정한 정치력을 보여줘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 총재가 여권과의 정치 게임에서 야당 총재로 자리를 잡은 것은 성공이지만, 그 과정에서 애초의 참신한 이미지를 적지 않게 잃어버린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윤여준 소장을 비롯한 이 총재의 핵심 브레인들은 이 총재의 새로운 모습을 구상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가장 큰 고민은 그동안 이 총재가 여야 정쟁 과정에서 3김과 차이가 없는 정치인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측근들은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3김과 다른 면모를 보여야 한다고 본다.

이 총재는 제2 창당에 큰 기대를 걸면서 “여권 신당은 알맹이 없는 포장에 치우쳐 국민으로부터 실망을 사고 있지만 우리는 알맹이 위주로 간다”라고 말했다. 철저한 3권 분립 체제와 정당 민주화 가은 정강 정책을 통해 정책 차별성을 분명히 드러내겠다는 얘기다.

“젊고 참신한 인재 영입 기대하라”
그러나 정책의 차별성은 국민에게 쉽게 전달되기 어렵다.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국민이 관심 있는 것은 정치 행태 변화다. 생산적이 대화와 타협,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시정하는 도덕성, 말의 신뢰성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라고 지적한다. 이 총재가 국민 피부에 아 닿는 구체적인 문제에서 차별성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물 영입 역시 이 총재가 새로운 면모를 보일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다. 그는 이에 대해 “참신한 인재를 많이 접촉하고 있고 반응이 좋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여권과 달리 당사자들이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대가 되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명단을 공개할 수 없지만 기대할 만하다고 얘기한다. 젊은 세대에 대해서도 밖에서 보는 것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한다.

이 총재의 이러한 노력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구여권과 맥이 닿아 있는 한나라당의 성격 때문에 새로운 인물, 특히 참신하고 개혁적인 인물을 끌어 모으는 데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 핵심 당직자 내부에서도 하순봉 사무총장은 합리적 보수층 영입을 강조하고, 이부영 총무는 개혁적 인사 수혈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조화시키면서 유권자에게 설득력 있는 진용을 어떻게 구축할지는 전적을 이 총재의 정치력에 달려 있다.

결국 총선을 앞두고 정책과 정치 행태, 인물 영입 측면에서 이 총재가 얼마나 알맹이 있는 내용을 내놓느냐 하는 점이 그의 정치력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 정치력에 따라 가까이는 내년 총선, 멀리는 차기 대선에서 이 총재의 입지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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