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도적 범죄, 보상 못한다?
  • 최영재 기자 ()
  • 승인 1999.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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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법원, 고엽제 피해 배상 소송 기각 … 한 · 미 정부, 비무장지대 피해자 보상책 마련할 듯

비무장지대 고엽제 살포 문제는 미군이 최초로 제안하고 요청한 사안이기 때문에 한 · 미 양국이 함께 풀어야 하는 문제이다. 또 고엽제는 유엔 협약과 제네바 의정서 등 국제 사회에서 문제 삼는 금지 무기이기 때문에 양국 국내법뿐만 아니라 국제법적인 시야로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미국 법원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미국에서는 고엽제 피해 보상 소송이 여러 건 있었다. 이 소송에는 제조회사를 상대로 한 것과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것이 있다.

우선 제조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 79년부터 미국 · 호주 · 뉴질랜드의 월남전 참전자 20만여 명은 미국 고엽제 제조회사 7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한국이 이 소송에서 빠진 것은 이런 재판이 있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이 재판은 피해자가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미국에는 ‘기업이 제품을 정부 주문에 따라 생산하여 정붕 판매했기 때문에 기업에 손해 배상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정부조달계약자 항변 원칙’이라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 더구나 고엽제는 애초 2차 세계 대전 때 미군이 개발한 약품이었다. 미국 법원은 이 원칙을 들어 원고측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제조회사들은 기업 이미지가 나빠지고 소송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84년 5월에 1억8천만 달러를 보상하기로 하고 피해자와 화해했다.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법원은 ‘페레스(Feres) 원칙’을 들어 모두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페레스 원칙은 군 복무 중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에 대해서는 정부를 상대로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언치이다. 이후 미국 정부는 피해자의 소송과 언론 보도가 이어지자 법령을 마련했다. 미국 국립과학원(NAS) 연구 결과를 근거로 하여 후유증이 있는 미군(91년부터)과 2세 자녀 질병(97년 10월부터)을 국가 차원에서 보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역 미군을 상대로 한 미국 정부 차원의 지원 개념이지, 한국 같은 제3국을 상대로 한 것은 아니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월남전 고엽제 피해자도 미국 법원에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미국 법원은 앞서의 두 원칙을 들어 모두 기각했다.

그렇다면 고엽제 문제는 미국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안인가. 미국 정부에 따질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 국제 사회가 고엽제를 문제 삼기 t작한 것은 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6년 11월 헝가리는 유엔 총회에서 미국이 베트남 전에서 쓰는 고엽제는, 제네바 의정서(1925년 6월 17일)에서 금지한 전쟁 수단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유엔 무대에서 고엽제 문제는 갑론을박을 거듭하다 69년 7월께 유엔 사무총장이 고엽제 사용을 금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69년 12월 16일 유엔은 ‘국제 전쟁에서 기체든, 고체든, 액체든 사람 · 동물 · 식물에서 독성 효과를 얻기 위해 화학 약품을 사용하는 것은 전쟁 시 질식성 · 독성 · 기타 가스 및 세균학적 전쟁 수단을 금지한 제네바 협약을 위배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한 · 미정부, 법정 소송 피할 가능성 높아
비무장지대 고엽제 살포는 미군의 요청을 한국군이 승인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한국군과 정부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다시 한국군 지휘부가 독성 여부를 알고 있었는지 조사를 통해 가려야 한다.

휴전선에 고엽제를 뿌린 때는 월남전에서 고엽제가 살포되던 시기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고엽제의 맹독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는 80년대의 미국 국내 법원 판결에서도 드러난다. 83년 5월 20일자 미국 뉴욕 지방법원 판결에서 조지 C. 프래트 판사는 ‘법원이 조사한 결과 베트남 전 당시 미국 정부는 고엽제의 유해성에 대해 의심할 여지없는 명백한 증거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정부와 군부는 베트남 전에서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를 사용하는 것이 비록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아군 전투 요원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라고 판결했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는 우방인 한국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은폐한 꼴이 된다.

전투원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금하는 것이 전쟁법의 대원칙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월남전에서 후유증이 큰 고엽제를 사용한 것은 전쟁 범죄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의 비무장지대에 고엽제를 뿌린 것은 전쟁 때가 아니라 평시에 일어난 일이다. 국제사법재판소 판례에 따르면, 전쟁 중의 위급한 상황에서 금지되는 것이라면 평시에는 당연히 불법이다. 조시현 교수(성신여대 · 국제법)는 비무장지대에 고엽제를 뿌린 것은 ‘인도에 반한 범죄’로 구성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교수는 국제법을 엄밀히 적용하면 미국 정부와 고엽제 제조회사가 공모해 국제 범죄를 저지를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행위가 범죄 행위로 판결된다면 시효는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다.

물론 미국 국내 법원은 고엽제 관련 국제 소송을 페레스 원칙 등 미국 국내법 원칙을 들어 모두 기각했다. 하지만 국제법은 국내법에 상위하는 법이다. 2차 세계대전 전범을 재판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과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례를 보면 국내법을 들어 국제법의 정신을 거스른 사례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국제법적인 검토가 제소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한 · 미 양국 정부가 이 문제를 가지고 법정으로까지 가서 소송을 벌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피해자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한 · 미 양국이 적절한 보상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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