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바람기는 못말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9.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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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처리로 억제 가능' 실험 결과 나와 선청선 입증‥ 정신의학은 환경 요인에 주목

바람기는 선천적인 것인가, 후천적인 것인가.

  최근 영국의 권위 있는 과학 잡지 <네이처>(8월19일자)에는 바람기에 관한 흥미있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 미국 에모리 대학 토머스 인설 박사 팀이 수행한 이 연구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유전자를 처리해 바람기를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이처>와 연합통신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연구팀은 먼저 바람기 많은 일반 들쥐와 가정적인 성향을 가진 프레리 들쥐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암컷과 교미한 뒤 곧바로 암컷을 떠나는 일반 숫쥐와 달리 프레리 들쥐 수컷은 교미를 끝낸 뒤에도 암컷과 같이 살며 태어난 새끼를 살뜰히 돌본다. 연구 팀은 프레리 들쥐의 유전자를 일반 들쥐에게 투여했는데, 그 결과 일반 들쥐는 놀랍게 변신했다. 때때로 다른 암컷과 교미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암컷 한 마리에게 충실한 성향으로 바뀐 것이다.

  일반 들쥐의 변신은 호르몬 투여가 공격성과 사교성에 영향을 미치는 뇌의 특정 호르몬 수용체에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연구팀은 최근 인간 아닌 다른 영장류를 상대로 유사한 실험을 실시했으며, 머지 않아 인간에 대한 실험도 계획하고 있다고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바람기 많은 남편을 둔 여성이라면 이같은 연구 결과에 가슴이 설레일 법하다. 배우자가 바람 피우는 것을 막기 위해 정조대ㆍ전족ㆍ음순 절제술(여성 할례)을 발명한 과거의 남성 못지 않게 현대 여성들은 남편의 외도를 막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왔다. 협박과 미행은 고전적인 방법이다. 일본에서는 외도를 추적하는 스프레이(속옷에 뿌려두면 체액과 반응해 색깔이 변한다)ㆍ크림(피부에 발라두면 샤워할 때 작은 물집이 생긴다)ㆍ겔(양말에 발라두면 15분 이상 양말을 벗어 놓을 경우 공기와 화학 반응을 일으켜 색깔이 변한다) 따위 첨단 발명품이 한 달 평균 2백 개 이상 팔리고 있다는 것이 외신의 최근 보도이다.

  그런데 미래에는 유전자를 조작해 바람기를 잠재울 수 있다니, 이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바람기가 유전자에서 말미암는다는 가설이 제기된 것은 극히 최근이다.

인체 곳곳에 남아 있는 바람기의 흔적
  '사람은 왜 바람을 피울까. 최악의 경우 돈ㆍ가족ㆍ명예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위험이 있는데도(간통한 아내를 둔 남편의 질투심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살인 사건의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어 왔다), 사람들은 왜 배우자 아닌 이성을 끊임없이 곁눈질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인류학자ㆍ생물학자ㆍ사회학자 들을 오랫동안 괴롭혀 왔다.

  이에 대해 진화생물학자들은 인류가 수만 년 진화 과정을 걲는 동안 조상으로부터 바람기를 물려 받았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이들에 따르면, 인류가 바람기를 대물림한 것은 바람을 피우는 편이 종족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단 여기에는 성차가 있다. 한 번 사정할 때마다 수천만 마리가 넘는 정자를 사정하는 남성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기 정자를 난자에 집어넣어 임신시키려는 본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초기 진화론의 설명이다. 반면 한 달에 한 번꼴로, 평생을 통틀어 4백 개 가량의 난자밖에 사용할 수 없는 여성은 자기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줄 기회가 얼마되지 않는다(이인식, <성이란 무엇이가>).

  따라서 남성은 여러 여성에게 '헤픈' 정자를 주입하는 편이 종족 번식에 유리하다. 이것이 '정자 전략'이다. 여성은 정반대로 자기에게 가까이 머무르면서 자식들을 부양해 줄 남성을 만나 '비싼' 난자를 투자하는 편이 종족 번식에 유리하다. 이것이 '난자 전략'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이같은 '정자-난자 전략'으로 남성이 더 바람기가 많은 이유를 설명해 왔다.

  인류학자인 도널드 시몬스 또한 남자들의 바람기가 유전적으로 대물림해 왔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바람을 피워 더 많은 자식을 둘 수 있었던 '능력 있는' 남성의 유전자는 자연 선택되어 그들의 후손에게 항상 새로운 여자를 유혹할 자질을 물려주게 되었다. 이와 달리 바람기 많은 여성의 유전자는 자연 도태되었다. 바람 난 여성은 자기와 자식을 부양할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아이들 또한 소홀하게 키울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시몬스에 따르자면 남성은 타고난 난봉꾼이며, 여성은 타고난 요조숙녀이다. 그러나 이같은 이론은 여성이 수동적이기를 바라는 남성들의 바람을 반영할 것일 뿐이라는 반박이 그 뒤 거세게 이어졌다.

  '남성들은 자기보다 열세에 놓여 있는 여성들의 본성에 대한 이미지를 조작함으로써 현상 유지를 도모해 왔다'는 것이 인류학자 마빈 헤리스의 비판이다. 여성 또한 바람기를 진화함으로써 여러 가지 이득을 얻어 왔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성과이다(52쪽 딸린 기사 참조).

  일부일처제가 정착하기 전 난교를 즐기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바람기의 흔적은 우리 몸 곳곳에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남성이 달고 있는 커다란 생식기이다. 인류의 사촌뻘 되는 고릴라나 오랑우탄과 비교했을 때 인간 남성의 생식기는 훨씬 크다. 수컷 고릴라의 고환이 몸무게의 0.018%, 오랑우탄이 몸무게의 0.048%인 데 비해 남자의 고환은 몸무게의 0.079%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 남성은 자기보다 훨씬 덩지가 큰 고릴라에 비해 4배나 큰 고환을 갖고 있다.

  이렇게 남성 생식기가 커진 것은 '정자 경쟁' 때문이라는 것이 생물학자들의 주장이다. 1 대 1로만 성관계를 갖는다면 생식기가 이렇게 클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난교를 하다 보니, 다시 말해 여러 남성이 여성 한 사람의 생식기를 동시에 점유하려다보니 정자 경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다른 정자를 제치고 자기 정자가 난자에 더 빨리 달려갈 수 있게 하려면 남성은 더 양이 많고 힘찬 정자를 배출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생식기 진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선천적 바람기 뒷받침하는 '쿨리지 효과'
  심리적으로도 바람기의 흔적은 남아 있다. 이 분야의 대가라 할 수 있는 데이비드 부스는 <욕망의 진화>(백년도서)라는 책에서 이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흔히 '연애 상대 따로, 결혼 상대 따로'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바람기를 진화시킨 인류의 심리적 유산이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곧 일시적인 바람 상대일 경우 기준을 완화할수록 후보를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인류의 축적된 경험이라는 주장이다.

  '쿨리지(coolidge) 효과'도 남성이 바람기를 타고났음을 뒷받침한다. 이는 새로운 이성에게 성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남성 심리를 가리킨다.

  쿨리지 효과는 인간분 아니라 다른 포유 동물에게도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교미가 끝날 때마다 다른 암소로 교체해 우리에 넣어 주면 황소의 성적 반응은 시들지 않는다. 반면 같은 암소를 들여 보내면 황소의 성적 반응은 급속하게 사라진다.

  데이비드 부스는 그밖에도 성관계가 끝난 직후 여자가 훨씬 덜 매력적으로 보이는 심리, 뒤탈 없이 돈을 주고 여자를 사려는 매춘 심리, 성적인 공상을 즐기는 심리 따위가 모두 '희생을 덜 치르고' 바람을 피우려는 습성이 진화한 데서 나왔다고 설명한다.

  도널드 시몬스는 동성애조차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하다. 곧 여자가 강요하는 낭만ㆍ관심ㆍ구속 따위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남자 동성 연애자의 분방한 성생활은 희생을 덜 치르고 바람을 피우려는 심리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이다(남자 동성연애자의 94%가 15명이 넘는 성관계 파트너를 갖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렇다고 '남자의 바람기는 무죄'라고 주장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유전자가 모든 인간 행동을 지배한다면 인류가 쌓아놓은 문명이란 의미가 없다. 진화론자조차 인간 행동이 유전자와 환경 양쪽 모두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무분멸한 바람기를 일종의 '강박 장애'로 본다. 알코올ㆍ도박에 빠져드는 것처럼 자극과 쾌락을 쫓는 이상 성격으로 보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 안병탁씨(안병탁신경정신과)는 바람을 자주 피우는 것은 마음이 허전하다는 증거라고 잘라 말한다. 자아가 약한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허전한 마음 한구석을 채워줄 누군가를 갈망하며 결혼을 시도하다. 그러나 결혼으로 자아가 채워질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결혼한 후에도 자아를 채워줄 누군가를 찾아 끊임없이 헤매며, 이것이 바람기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외도 부추겨 왔다"
  '난봉군 아버지 밑에 난봉꾼 아들 난다'는 속설대로 유전 요인보다는 환경 요인에서 그 뿌리를 찾는 것이 정신의학이다. 안병탁씨는 이를 '억압자와의 동일시' 현상으로 설명하다. 이는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식으로, 억압자를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여기에 대항하거나 이길 힘이 없는 약자가 억압자를 닮아가는 현상을 말한다. 곧 의식적으로는 바람둥이 아버지를 혐오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아버지의 권위를 내면화하게 된 아들이 아버지의 전철을 밟는다는 것이다.

  여성학자들의 비판은 더욱 신랄하다. 이들은 '타고난 바람기'보다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는 법과 제도가 외도를 부추겨 왔다고 비판한다. '상대를 집안에 끌어들이지 않는 한 남자에게는 정조를 지키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명문화했던 <나폴레옹 법전>은 고전적인 예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나라가 매춘을 합법화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문명의 발명품이 진화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피임약 등장이라는 '제1차 성(性) 혁명'에 이어 비아그라 등장이라는, 최근의 '제2차 성 혁명'은 인류의 바람기를 새로운 방향으로진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전망이다.

  킨제이 보고서는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여자는 폐경기 직전 혼외 정사 비율이 증가한다고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남자가 성적 욕망을 배출하는 통로로 외도를 이용하는 비율은 16~35세 20%, 36세~60세 26%, 41~45세 30%, 46~50세 35%로 점점 높아진다.

  97년 한국노인의전화가 65세 이상 남녀 노인 40명을 상대로 벌인 조사에서도 남자 노인 가운데 69%는 '배우자 아닌 다른 사람과 성관계 욕구가 있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50세만 넘으면 남성 3명 가운데 1명은 발기부전, 곧 마음은 굴뚝같은데 몸이 따르지 않는 것이 물리적인 현실이었다.

  비아그라 발매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최근 외신에는 60대 할머니가 미국 화이자 사(비아그라를 개발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성생활이 불가능했던 남편이 비아그라 효과를 체험한 뒤 이혼을 요구했다는 것이 소송 이유였다. 비아그라는 폐경 이후 여성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 김창규 박사(연이산부인과 원장)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잠재되어 왔던 인류의 바람기가 새롭게 '날개'를 단 셈인가. 린 마굴리스는 최근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나온 <성이란 무엇인가>(지호)에서 '인류가 바야흐로 성을 번식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피임약ㆍ비아그라를 넘어 사이버 섹스가 본격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 그의 분석은 묵시록적인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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