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독창적 마르크스 이론가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2006.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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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폴 피콘은 마르크시즘이 정치이념으로서 지위를 유지하려면 ‘그람시의 방식을 따라야 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그 예언은 확실히 들어맞았다. 60년대가 알튀세르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분명히 그람시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 그람시가 처음 소개된 것은 지난 80년대 중반이다. 당시 찰나적으로 등장한 그람시와 90년대에 다시 열풍이 되어 불고 있는 그람시붐은 매우 극적인 대비를 보인다. 전자가 마르크스로 통하는 한 골목길이었다면 후자는 마르크스의 시체 위에 놓은 신작로이다. 이런 양상은 서유럽에서도 똑같이 전개되고 있다(《시사저널》제98호 ‘마르크스주의 재해석 활발??참조).

이탈리아 천민들이 살고 있던 남부 지역, 그중에서도 사르디니아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 자란 곱추 아이 안토니오 그람시의 가슴 속에 반역의 불길이 처음 타오른 것은 열세살 나던 해인 1904년 9월이었다. 그람시는 본토에서 파견한 군대가 사르디니아 광부 3명을 무차별 사살하여 폭동을 진압한 사건을 목도했다.

이탈리아의 튜린시에 있는 대학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섬을 처음 빠져나왔을 때 그는 세계사를 아직도 사회적 냉대에의 응전 또는 사르디니아 비극의 확대판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미 사회주의자로 예비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그람시는 직업 정치가로 변모하였으며 1917년 튜린에서 혁명적 봉기가 일어났을 때는 이미 이도시의 사회주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노동조합이나 정당의 기능과는 전혀 다른 매우 독창적인 노동자 조직인 공장평의회를 결성한 것도 이즈음이다. 투옥되기 전까지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당을 주도하고 코민테른에 가담하였으나 그는 어떤 교조아래서도 안주할 수 없었다. 그러한 그가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조리돌림 속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은 것은 당연한 결과일는지도 모른다.

26년 11월 무솔리니에게 체포되어 28년 5월 재판을 받을 때 파시스트 정권은 “우리는 이 자의 두뇌를 20년 동안은 가동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선포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20년 4개월 5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람시는 3천쪽에 달하는 《옥중수고》를 완성함으로써 마르크스?레닌 이후 가장 독창적인 마르크스 이론가가 되었다.

스무살이 넘자 비로소 관을 치워버렸을 정도로 허약한 육신과,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가 횡령사건으로 실직한 뒤 평생을 지배당한 절망적인 궁핍, 당과 아내로부터의 외면을 딛고 일어선 한 인간의 투쟁의 결과였다.

그람시가 옥중에서 완성한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은 국가와 시민사회, 지식인 이론, 헤게모니, 수동적 혁명, 진지전·기동전 등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지전과 기동전이라는 혁명전략이다. 그는 러시아혁명을 기동전의 마지막 형태로 규정했다. 10월혁명을 서구 선진자본주의 사회에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진지전 전략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다. 일종의 정치적 참호전인 진지전은 다양한 사회조직과 문화적 영향력을 포괄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마르크스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람시는 형기를 채우지 못하고 4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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