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목적 ‘용팔이 수사’ 정치권 內戰 서막인가
  • 김 훈 사회·기획특집 부장 ()
  • 승인 2006.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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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잔류세력과의 싸움…안기부 방향 전환과도 밀접한 관련

5공 시절인 지난 87년 4월 24일, 당시 통일민주당 관악지구당 창당대회장을 정체 모를 괴한들이 습격한 사건(일명 용팔이 사건)은 그동안 정치권력의 기상도와 민감하게 맞물리면서 쥐었다 폈다 하는 정치성 수사로 진행되어 왔다.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씨가 3월8일 서울지검 남부지청에 폭력교사 및 업무방해혐의 등으로 사법처리됨으로써 이 해묵은 사건에 대한 사법적 인책 범위의 최고 수준을 분명히 드러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른바 3당 통합에 의해 거대한 외형을 구축했던 정치권 안에 깊은 적대 관계와 원한관계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냄으로써 향후 정국의 기상도를 가늠케 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환경 변화로 수사 급진전

또 안기부의 정치공작 업무에 대한 검찰지청의 수사가 안기부의 공작금 추적, 공작활동에 대한 증거수집, 전 현직 안기부 간부 소환, 그리고 전직 안기부장 구속에 이르기까지 안기부의 조직과 공작업무 내용을 전례없이 깊숙이 훑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사전 자체의 사법적 처리보다도 사건을 수사하는 방향이 향후 안기부의 체제 축소와 방향 전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수사 재개와 그 신속한 전진은 ‘정치적 다용도??인 셈이다.

서울지검 남부지청 지난 2월25일 이른바 용팔이 사건의 배후 주모자로 지목되어 6년 동안 수배되어 왔던 이택돈 전 신민당 원내총무를 ‘불심검문?? 형식으로 검거한 후,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구속에 이른 수사과정은 하루가 다르게 신속히 진전되었고, 그 상황도 그날그날 언론에 노출되어 왔다.

수사의 이러한 급진전은 전적으로 정치환경의 변화에 힘입고 있다. 이택돈 전 의원이 구속되자 ‘용팔이 사건??의 배후를 추궁하는 화살은 우선 박철언 의원과 이해구 내무장관 쪽으로 겨누어졌다. 박철언 의원은 87년 사전 당시 안기부장 제2특보였고 이해구 장관은 안기부 제1차장이었다. 이택돈 전 의원이 구속된 직후, 박철언 의원은 신속하고도 완강하게 이 사건에 대응했다. 박의원은 당시 안기부장 제2특보의 직무상 국내정치 문제에 개입할 위치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했고, 국내정치 담당은 안기부 제1차장이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해구 내무장관을 화살의 표적으로 떠올렸다. 그러나 검찰은 박철언 의원의 이같은 주장을 수사의 근거로 삼지는 않았고, 다만 당시의 정황을 이해하는 자료로서만 인정하고 있는 듯한 태도이다. 검찰이 수사 근거로 채택한 것은 이미 이 사건과 관련해 2년간 복역하고 출감한 이택희 전 의원의 진술이다. 이택돈 전 의원이 구속된 직후 이택희 전 의원은 검찰에 자진출두 형식으로 나타나 당시 이 사건이 장세동 안기부장의 지휘책임과 자금조달 아래 저질러졌던 것임을 밝혔다. 이택희 전 의원의 진술 내용이 그동안 검찰이 추척해온 87년 3월 무렵 안기부의 자금 이동과 맞아떨어지자 검찰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직접 겨냥하기에 이른 것이다. 즉 87년 3월 4월 장세동씨는 이택돈 이택희 두 전의원을 서울 궁정동 안가로 수차례 불러 통일민주당  창당 행사를 습격하라고 지시했고, 그 무렵 증권회사 등의 안기부 비밀계좌에서 5억원을 인출해 돈 세탁과정을 거친 뒤 두 이씨의 가명계좌에 입금시킨 사실을 검찰이 확인했다는 것이다.

“사흘만에 증거수집 어려워??

이택희 전 의원은 3월5일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3월8일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소환되었다. 그러므로 이 사흘 동안 검찰이 이택희 전 의원의 진술을 토대로 안기부의 비밀자금 이동 상황을 확인하고 그 증거를 수집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검찰은 이택희 전 의원의 진술이 있기 이전에 이미 안기부의 자금 이동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고 여기에 이택희 전 의원의 진술을 연결시켰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다. 따라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적어도 돈에 관한 추궁을 모면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돈을 방출한 의도가 야당의 행사장을 파괴하라는 공작금이 아니라 이택희 이택돈 두 전직의원의 정치노선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전달한 일종의 ‘성금??이며, 그같은 성금을 준 것이 안기부장 직무의 특수성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검찰의 수사는 또 한번 난관에 빠질 수 있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이 돈의 방출 경로가 당시 안기부 제1차장 이해구씨를 경유한 것이었으며 또 사태에 대한 보고가 이해구씨를 경유해 자신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 사건의 정치적 파장은 더욱 커질 것이 분명하다. 장세동·이택희·이택돈·‘용팔이?? 등 하수인에 이르는 계선의 상층부에서 이해구 장관이 다시 거론된다면, 검찰의 수사는 더욱 큰 정치적 무게를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검찰이 이 무게를 버티어내지 못한다면, 이 사건의 수사는 안기부의 조직과 자금이 동원된 범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그것을 책임져야 할 인물의 전모를 밝혀내지 못하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도 있다.

‘용팔이 사건??은 87년 당시 대통력직선제 개헌을 둘러싸고 야권이 연대해 강성 야당을 출범시키려 했던, 5공 최대의 정치적 전환의 현장을 정체 불명의 괴한들이 폭력으로 습격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 이 사건은 다만 거대 야당을 원치 않은 당내 분파주의 정치노선을 따르는 몇몇 옛 야당 인사들이 폭력조직을 교사해서 저지른 ??당내문제??로 결론짓고 이택희 전 의원이 이 ??당내문제??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지고 복역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사건의 현장을 지휘한 혐의로 수배된 이승완씨(전 호국청년연합회 총재)는 수배중에 호위청년들을 거느리고 공식석상에 나타나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는 등 대담한 행동으로 수사기관을 비웃었다. 이 사건은 결국 5공세력의 정치권력이 쇠퇴하기를 기다려 해결될 수밖에 없었을 터인데, 이승완씨는 지난 90년 3월에 검거되었고 이씨의 검거에 따라 이택돈 전 의원이 또다른 배후로 지목되어 수배되었다.

안기부 위상 문제도 걸려 있어

5공 세력의 쇠퇴에 따라 사건 수사는 몇년씩 공백을 두어가며 한 단계씩 어렵게 진전되어 왔다. 이택돈 전 의원이나 이승완씨의 검거경위를 들여다보면 수사기관이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수사력을 집중해왔다기보다는 그들의 주변을 세밀히 파악해 놓은 상태에서 세월이 흘렀고, 정치적 환경의 변화가 왔다고 볼 수 있다. 이택돈 전 의원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날 갑자기 ‘불심 검문??으로 붙잡혔다. 그리고 수사는 안개 속에서도 급진전되어 안기부의 조직과 자금 그리고 전직 수뇌부에까지 확장되었다.

이 사건은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원한이 사무친 사건이기도 하고 또 5공 세력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새 정권 아래서 안기부의 위상과 방향 전환 문제가 걸린 미래용 싸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3당 통합을 거치면서 이미 새 정권 쪽을 편입된 괴로운 옛 인연과의 싸움이라는 점이 이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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