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미군, 응징할 수 없다?
  • 최영재 기자 ()
  • 승인 1999.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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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법으로 풀어본‘노근리 사건’/미국의 전쟁 범죄 다룬 국제 재판 전무

한국과 미국 두 나라가 미군의 노근리 학살 사건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미국은 마이클 애커먼 육군 감찰감(중장)을 단장으로 하는‘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을 10월29일 충북 영동에 보내 첫 조사를 벌였다. 이들은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을 둘러보고 당시 피난민의 이동 경로와 폭격 · 기관총 난사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쌍굴다리에 남아 있는 총탄 자국을 확인했다.

 한 · 미 두 나라 조사단은 진상 조사를 내년 상반기까지는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 두 나라는 또 관련 문헌 조사 · 증언 청취 · 현장 조사를 포함해서 광범위하게 노근리 학살 문제를 조사하고, 양쪽 실무진이 서로의 조사 내용에 대해 중간 평가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현재 두 나라가 진행하는 조사는 문제해결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먼저 조사단은 배상과 처벌에 대한 명확한 권한이 없다. 조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보장한 제도적 장치 또한 불명확하다. 따라서 두 나라 국민 사이에 끊임없이 왜곡 · 은폐 시비가 일 것으로 보인다. 한 · 미 두 나라는 조사단을 만들 때부터 입장 차이가 있었다. 한국은 공동 조사단을 구성하자고 요구한 반면에, 미국은 각자의 조사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조사내용을 공유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공동 조사단을 만들자는 주장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두 나라의 이해가 걸린 이런 문제는 제3국 인사로 구성된 국제공동조사위원회를 만들어야만 객관적인 조사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한 · 미 두 나라의 조사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다. 조사를 한 다음 어떻게 하겠다는 원칙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건은 피해를 조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가해자를 처벌하는 문제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가해자에 대한 사법 처리는 피해자가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와는 상관없는 문제이다.

미국,‘전쟁 범죄 시효 부적용 협약’가입안해
 노근리 조사가 마무리된 뒤 예상 할 수 있는 한 · 미 두 나라의 조처는 피해자에게 위로금 형식으로 일정액을 제시하는 정도이다. 이는 법적인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2차 세계대전 때 종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피해자와 일본 정부가 벌인 논쟁도 이와 비슷하다. 종군위안부는 국가 차원에서 저질러진 전쟁 범죄이므로 국가 차원에서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사법 차원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민 기금을 조성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노근리 조사는 재판이 아니기 때문에 법적 구속력을 가지려면 다로 입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노근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 사회가 과거 전쟁 범죄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에 전쟁 배상금을 물린 재판 사례를 들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만든‘프랑스 · 멕시코 배상위원회’도 있다. 이 위원회는 멕시코에서 일어난 내전 때문에 프랑스인이 입은 인명 · 재산 피해를 배상받는 재판이었다.

 79년 이란 회교 혁명 때 이란에서 미국 시민이 당한 인권 · 재산권 침해를 조사하고 보상한 배상위원회도 있다. 또 91년 유엔 안보리는 걸프전이 끝난 이후 연합군이 피해를 보상하는 위원회를 구성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국제 재판은 주로 강대국의피해를 보상하는 국제 절차였다. 배상하는 국가들은 한결같이 패전국이나 약소국이었다.

 현재 미국은 전 세계에 자국군대를 파견해 놓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이들이 전쟁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미국은 자국 군법에 따라 개별 병사를 처벌한 적은 있지만 국제법에 따라 미군 병사들의  전쟁 범죄를 국가 차원에서 공식 인정하고 배상한 사례가 없다. 미국은 이런 배상 요구를 미국의 국익과 세계 전략을 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98년 로마에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되었을 때도 가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노근리 문제는 이러한 미국의 선례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하다.

 이번 사건의 처벌 대상은 두 부류이다. 당시 학살에 가담해 직접 방아쇠를 당긴 사람과, 학살 명령을 내리거나 방조한 전쟁 지도자가 그들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 책임 문제도 나올 수 있다. 한국전쟁 때 한국군의 작전권은 미군에 넘어가 있었고 모든 작전은 한 · 미 연합작전이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한국군이 노근리 학살 사건에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사건을 법으로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시효이다. 현재 한 · 미간의 실정법에 비추어 보면 노근리 문제는 시효가 끝난 사건이다. 따라서 형사 처벌이 불가능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법 해석에 따라 시효를 적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전쟁 범죄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국제관례이다. 97년 7월 미국 하원위원 15명이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하고 손해를 배상하라고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한 적이 있다.

 비록 한국과 미국은 가입하지 않았지만 유엔은 68년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시효 부적용 협약’을 맺은 바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열린 나치 전범 재판에서도 연합국은 시효를 적용하지 않았다. 프랑스 법원 또한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재판에서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일본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 게리 맥두걸씨도 보고서에서 일본의 책임은 시효에 따라 소멸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노근리 학살,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가능
 물론 이를 위해서는 노근리 사건의 범죄 성격이 확실히 밝혀져야 한다. 미군의 당시 작전이 민간인 생명을 유린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고 전개되었다면, 또 이런 민간인 학살이 조직적으로 벌어졌다면 이는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인 범죄로 규정될 수 있다. 한국전쟁은 국제법인 국제인도법과 제네바협약이 적용되는 전쟁이다. 국제인도법의 핵심은 군사 목적에서 벗어난 불필요한 학살과 파괴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다.

 노근리 사건은 범죄 행위를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발 방지를 위해서도 의미가 크다. 만약 한국전쟁 이후 노근리 문제가 제대로 사법 처리 되었다면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저지른 밀라이 학살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현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법적인 정리는 50년이 지난 지금가지 그대로 남아 있다. 남북 분단과 한 · 미 관계 때문에 이를 정리하기는 그동안 불가능했다. 노근리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 역사가 한국전을 극복하는 중요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한국을 위해서만 아니라 성숙한 한 · 미 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 사건은 의미가 크다(이 기사에 법률 자문은 국제 분쟁 전문가인 성신여대 법학과 조시현 교수가 맡았다).                         
崔寧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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