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선이‘금강’으로 간 까닭은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9.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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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펴내

 ■ 출판

금강산 뱃길이 열린 지 1년. 그간 12만여명이나 관광을 다녀왔다. 분단 이후 금강산에는‘그리운’이라는 수식어가 늘 붙어 있었다. 순식간에 그 많은 사람이 금강산으로 달려간 까닭은 바로 그‘그리움’에서 말미암았다. 그러나 금강산은 이제‘그리운’이라는 단어를 더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대 이래 수많은 사람이 금강산을 찾았지만, 기행의 의미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통일신라시대 의상 대사 이후 금강산이 <화엄경>에 등장한 뒤로 금강산은 불가(佛家)에서 신산(神山)으로 떠받들렸으며, 그 같은 태도는 고려 시대에까지 이어졌다. 불교가 힘을 잃은 조선 전기를 지나, 조선시대 문화 절정기였던 18세기 진경(眞景)시대에 이르러서는 지식인 · 예술가라면 반드시 금강산을 친견해야 했다.
 
작품 절반이 금강산 그림
 금강산에 대한 태도가 그러했으니, 진경 시대의 화성(畵聖) 겸재(謙齋) 정 선(鄭仙 · 1676~1759)이 금강산 기행의 선두에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겸재는 진경산수 화법을 평생 갈고 닦아 우리 국토의 아름다운 경치를 기회가 닿는 대로 찾아다니며 그려 남겼는데, 그의 작품 가운데 금강산은 절반가량에 이른다.

 불가의 노승(老僧)들은 지금도‘금강산을 못보면 중 노릇 제대로 못 한다’며 금강산을 그리워한다. 겸재를 비롯한 조선시대 지식인 · 예술가들에서 시작된 금강산 열망 전통은 분단되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왜 금강산인가? 그것은 비단 금강산의 배어난 절경에서 연유하는 것만은 아니다.

 최근에 나온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대원사)은 금강산을 화폭에 담은 겸재의 작품을 설명하는 책이지만, 금강산이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에 어떤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지를 잘 알려준다. 이 책을 쓴 이는 18세기 조선 시대 문예 부흥기를 연구해, 그 시대를‘진경 시대’라고 명명한 간송미술관(서울 성북동)최완수 연구실장이다.

 이 책이 지닌 미덕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서른여섯에 금강산을 처음 찾은 겸재가, 여든넷에 돌아갈 때까지 50년 동안 마음에 품으며 풀어낸 금강산을 지은이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여행’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음은 한국 회솨 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화가이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왜 금강산을 평생 마음에 품고 다닐 수밖에 없었는지를 소상하게 밝혔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정식 경로는 의정부-포천-영평-철원-금화-금성을 지나 단발령을 넘어가는 길이다. 겸재는 금강산을 찾아가면서 그 길에 펼쳐진 경승(景勝)을 화폭에 담았을 뿐만 아니라, 장안사를 거쳐 내금강 · 외금강을 두루 살폈다. 겸재의 발길은 금강산에서 고성으로 빠져나가 해금강에 닿고, 관동팔경을 오르내리는 것으로 끝난다.
 
그림에 당대의 색채 · 정신 세계 담아
 겸재의 그림을 통해 독자들을 금강산으로 안내하는 지은이는, 겸재의 그림에 들어 있는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그이 정신과 뛰어난 예술성을 소개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겸재는 주역에 정통한 성리학자이다. 겸재의 위대함이란 금강산의 절경을 있는 그대로 사생했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겸재의 그림에는 진경 시대의 꽃을 피운 당대의 정신세계와 색채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든 고유 이념이 생기면 그 꽃은 문학으로 가장 먼지 피어나고, 글씨를 거쳐 그림으로 이어진다”라고 지은이는 말했다. 겸재의 작품이 뛰어난 천재 화가의 역량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대를 지배하던 이념과 문화적 자긍심에서 나왔다는 얘기이다.

 이를 반영하듯 겸재의 그림에는 그이 스승인 삼연 김창흡, 겸재의 평생지기로 진경시(詩)의 대가인 사천 이병연 같은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제화시(題畵詩 · 그림의 감흥을 돋우려고 그림에 곁들인 시)가 붙어 있다.

 “겸재가 출연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라고 지은이는 말했다. 겸재 같은 화가가 탄생하고, 금강산이 겸재라는 불세출의 화성을 만나 그 진가를 인정 받게 되는 데는 그 시대의 환경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금강산은 율곡 이이가 나와서 이기이원론인 주자성리학을 이기일원론으로 심화 발전시켜 조선성리학으로 토착화시키면서부터, 성리학 이념이 이상적으로 구현된 천하제일의 명승으로 각광받게 된다.”

 조선성리학이라는 고유 이념이 출연해 문화각 방면에 고유색을 고양해 가면서 국토애를 바탕으로 하는 진경 문학이 일어나게 되는데, 율곡의 절친한 친구인 송강 정 철은 한글 가사로 <관동별곡>을 지어 금강산의 빼어난 경치를 조선 성리학자이 자긍에 찬 시각으로 읊어낸다.

 지은이에 따르면, 진경 문화를 이끌던 조선 지식인들은 중원을 차지한 여진족 청(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조선이 세계문화의 중심인 중화(中華)그 자체라는 조선중화(朝鮮中華)사상에 입각해 모든 문화의 기준을 우리에게 두려고 하였다. 그 결과 금강산은 음양(陰陽)이 이상적으로 조화된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땅으로 높이 평가되어, 물성(物性 · 사물의 성질)을 따지는 성리학자라면 반드시 순례해야 할 곳으로 인식되었다.

<주역>의 음양 원리 따라 금강산 고려
  겸재의 금강산은 이같은 사상의 토양에서 탄생했다. 겸재는 성리학의 기본 경전인 <주역>의 음양 원리에 입각해 음양 조화와 음양 대비 원리로 화면을 구성하는 새로운 화풍을 창안해 금강산을 그렸다. 이를테면, 수목이 우거진 토산(土山)은 음으로, 골기(骨氣)가 삼엄한 암봉(岩峯)은 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법기(法起)보살이 머무르는 곳으로 추앙받으면서 불교에서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었던 금강산은, 진경 시대에 이르러 다시 세계에서 으뜸가는 성지로 떠올랐다. 금강산은 완벽한 음향의 조화, 곧 성리학의 이념을 제대로 표출한 곳이기 때문이다.”

 최완수 실장은 금강산에 대한 그같은 인식은 우리 땅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 의식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근대 사학 이후로 우리는 우리 역사를 긍정적으로 자각하면서 평가한 적이 없다. 우리를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요즘처럼 미국식 시각으로 보면 금강산의 표면박에 보지 못한다.”

 뒷길(뱃길)이 아니라, 조선 시대 지식인 · 예술가들이 밟은 정식 경로를 따라 금강산에 가고 싶다는 지은이는, 겸재의 그림과 문헌만으로도 금강산 주변의 지형을 손금 들여다보듯 묘사해 놓았다. 그는 금강산 관광에 나서는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금강산에는 우리의 유구한 정신이 담경있다. 우리가 금강산을 대하는 자세는 최소한 외국인의 자세와는 달라야 한다.”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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