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키스’를 누가 추억이라 하는가
  • 김주환(연세대 교수 · 신문방송학) ()
  • 승인 1999.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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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평

유명 작가나 철학자의 수고(手稿)는 그에 기반을 두고 출판된 모든 텍스트에 정통성을 부여하는‘원본’이다. 수고라는 진정한 원본이 있는 한 그것을 출판한 모든 텍스트는 2차적인 복사본에 불과하다. 그러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우리들의 수고스러운 글쓰기에는 수고(manu-script)가 없다. 디지털 텍스트에는 다른 모든 복제본에 권위를 부여하는 우너본인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컴퓨터로 쓰고 있는 이 글에도 원본이 없다. 이 글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플로피 디스켓에‘복사’한다고 해서 컴퓨터의 하드 디스켓에 들어있는 것을 원본이라 할 수는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마저도 컴퓨터 메모리(RAM)에 잇던 것이 복사된 것이기 때문이다.‘저장하기’라는 명령어는 곧 메모리에 잇는 정보를 디스켓에‘복사’하라는 명령이나 다름없다. 컴퓨터 메모리에 있던 자료는 컴퓨터를 끄면 사라진다. 영원히 사라진다. 디스켓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위에 새로운 자료가 덧씌워지면, 그것도 영원히 사라져버린다. 순간적으로. 그리하여 몇 번이고 퇴고(推敲)하여 쓴 글이든 그냥 갈겨쓴 글이든 컴퓨터 파일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 저장된 자료는 계속적인 복제를 통해 영원히 존재할 가능성을 획득한다. 만약 하드 디스크가 물리적으로 낡거나 문제가 생기면, 그 자료를 새로운 디스크에 옮기면 된다. 이러한 복사는 기존 복사와는 다른다. 복사된 것이 원본(?)과 아무런 차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원본과 똑같은 아우라(aura)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텍스트에는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과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언제나 동시에 구현되어 있다. 정보의 디지털화는 존재론적으로도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인류는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대상 중에서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릴 수 있으면서도, 또 동시에 영원할 수 있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인간 자신이 스스로 생산한 것 중에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 현대 철학의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처음부터 다시 쓰여야 할 판이다.

 디지털 정보에 기반을 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이용하면, 첫사랑의 애인마저도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애인과 함께 했던 당신의 즐거운 추억들은 모두 당신이 지각(知覺)했던 것이다. 그의 향기로운 머리 내음(후각), 짜릿한 입술(입술에 의한 촉각), 빛나던 눈동자(시각), 달콤했던 목소리(청각), 나긋나긋한 허리와 가슴에 와 닿던 뭉클함(손과 몸에 의한 촉각) 등. 아, 그리고 바로 그 때, 부드러운 가을바람에 날려 내 뺨을 스치던 그의 머릿결(촉각+시각). 이러한 모든 감각적 자료들은 생산될 수 있고, 저장될 수 있으면, 또 적절한 기구에 의해 재생될 수 있다는 것이 가상현실의 이론이다. 아직 원시적인 수준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가상현실 기술은 의과 대학에서의 수술 연습용이나 전투기 조종사의 비행 훈련용 등으로 실제 사용되고 이다.

추억도 영원히 간직하는‘복제 시대’
 멀지 않은 미래에 온몸과 눈, 귀,코에 적절한 가상현실 기구를 부착한 당신은, 당신의 애인을 만났을 때와 똑같은 일을 얼마든지 반복해서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의 첫사랑은 말 그대로 영원한 것이 된다.‘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이제 더 이상 추억이 아니며,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는 현실이 된다. 당신의 애인은 디지털화한 정보로써 컴퓨터 속에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언짢게 들리겠지만 당신의 애인은 당신 몰래 다른 누군가에 의해‘경험’될 가능성마저 있다. 그리고 만약 그 누군가가 돈이 필요하다면(또 당신의 애인이 정말 미인이라면), 그는 당신의‘디지털 애인’을 마구 복재해 상품화하거나 인터넷 음란 사이트에 올려놓을지도 몰느다. 컴퓨터에 갇힌 당신의 불쌍한 애인은, 마치 알라딘 마법사가 램프를 문지를 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누구든 컴퓨터를 켜는 사람에게 나타나 봄바람에 머릿결을 흩날리며 당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정열적 키스를 계속 반복할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는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기는 것보다 자신의 데이터를 지울 것은 지우고 정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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