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물이 흐려 이 지경 되었다”
  • 김종민 기자 ()
  • 승인 1999.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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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검사들, 권력 지향 간부들에 비난 화살···잘못된 관행·의식 바로잡아야 신뢰 회복

99년은 검찰 역사에서 최악의 해가 되고 있다. 올해 초 대전 법조 비리 사건을 시작으로 이번 옷로비 보고서 유출 사건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사건의 주요 수사 대상은 다름아닌 전·현직 검사였다. 검찰이 검찰을 수사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 일선 검사들은 지친 분위기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답답하지만 신경쓰고 싶지 않다.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그 복잡한 심경의 속내는 이렇다. 우선 일부 정치적 사안에서 외풍에 휘둘려 떳떳하지 못했던 점에 대한 불만이다. 특히 몇몇 검찰 고위 인사들에 대한 불만이 크다. 지난 2월 평검사 서명에 참여했던 한 검사는 “당시 김태정 총장이 검찰 내부의 민심을 받아들여 용퇴했다면 본인이나 검찰이나 이런 수렁에까지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최근 검찰 간부회의에서도 김태정 전 총장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 터져 나왔다. 검사장급인 한 현직 간부는 “검찰 문제의 핵심은 검찰 수뇌부의 문제다. 그동안 검찰 수뇌부가 정치 권력에 선을 대 고위직에 올랐고, 그러다 보니 권력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나도 인사 때면 정치권에 선을 대 보려 했던 적이 있다”라고 털어놓았다.

 대부분의 일선 검사들은 지난 몇 년간 검찰총장을 지낸 김기춘·김도언·김기수·김태정 씨가 모두 이런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현직인 박순용 검찰총장에 대해서는 신뢰하는 편이지만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하기는 어려우리라는 것이 일선 검사들의 대체적인 판단이다.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 때 특별검사의 수사에 불만을 품은 닉슨 대통령은 법무장관에게 특별검사를 해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법무장관은 부당한 지시라며 사표를 썼다. 신임 장관으로 법무 차관이 임명되었는데 그 역시 부당한 명령에 반발해 사표를 썼다. 한국 검찰이 정치적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치 권력의 부당한 지시에 떳떳하게 맞서는 검찰 수뇌부가 필요하다는 것이 일선 검사들의 의견이다.

 그러나 일선 검사들은 검찰 독립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 분위기다. 서울지검의 한 중견 검사는 “검찰과 정치권이 동시에 변해야 한다. 앞으로 두세 번 정권 교체가 더 되는 수밖에 없다”라며 호흡을 길게 했다.

“권력뿐 아니라 잘못된 여론으로부터도 독립해야”
 일선 검사들은 검찰 조직 전체가 불신의 수렁에 빠진 것에 착잡해 하면서도 마치 검찰을 왜곡·조작까지 일삼는 집단으로 몰아가고 있는 분위기에 대해서도 불만이 크다. 서울지검의 한 고참 검사는 “검찰이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정치 권력으로부터의 독립뿐만 아니라 잘못된 여론으로부터의 독립도 필요하다”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우선 옷로비 사건 수사를 보는 견해부터 일반 여론과 차이가 있다. 서울지검의 한 평검사는 “당시 법무부장관 부인인 연정희씨를 소환하면서 과잉 보호한 점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수사 내용 자체가 왜곡되거나 축소됐다고 보지는 않는 것이 일선 검사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라고 전했다. 특검의 수사와 비교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다. 특검 수사 관정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특검이 수사를 통해 새롭게 밝혀냈다기보다는 관련자들의 제보를 통해 드러난 것이므로 검찰의 수사 능력이나 의지를 문제 삼는 것은 부당하다는 얘기다.

 파업 유도 의혹에 대해서도 진형구씨의 개인적 공명심에서 비롯된 촌극이라고 보는 것이 검찰 간부나 고참 검사들의 대체적인 분위기이다. 검찰이 공안 문제를 ‘진압 차원’에서 다루어 왔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일반 여론과는 거리가 있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지금은 여론의 질타를 받지만 검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 언젠가 평가 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사회 분위기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 검찰이 맞고 있는 ‘신회의 위기’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옷로비 사건의 배정숙씨는 뒤늦게 특급에 옷로비 문건을 전달하게 된 이유를 검찰 수사가 공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라스포사 여직원 이혜음씨가 장부를 조작한 사실이 검찰이 아닌 특급에 와서야 밝혀진 점도 문제다. 왜 사람들이 검찰을 신뢰하지 않는가에 대해 좀더 심각한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 초 대전 법조 비리 사건 때 대부분의 검사들은 변호인에게 술접대를 받고 명절 선물과 전별금을 받은 것에 대해 오래된 관행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대형 사건의 이면에는 항상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기업인들에게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인이나 관내 업주들에게 수십만원씩 받은 공무원이 있었다. 그 오래된 관행과 맞서 싸워야 할 검찰이 스스로의 잘못된 관행에 너그러운 것을 국민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파업 유도 의혹과 관련해서 서울지검의 한 평검사는 “검찰이 조직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겠지만 진형구씨가 그런 얘기를 자랑 삼아 했더라도 검찰의 그동안 관행으로 볼 때 문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검찰이 신뢰를 회복하려면 정치권과 검찰의 부적절한 관계를 끊는 것도 중요하지만 검찰 내부의 오래된 의식과 관행 역시 소홀히 볼 것이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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