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비로소 한명 석방된 셈”
  • 김 당 기자 ()
  • 승인 2006.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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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환대상 비전향 장기수 40여명…보안감찰로 ‘옥살이’ 계속



 그동안 나라 안팎에서 지대한 관심을 모은 이인모씨가 마침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정부 당국은 이씨가 전쟁포로가 아니라 90년에 국적을 취득한 대한민국 국민이므로 ‘송환’이 아니라 ‘방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통일원이 이씨에게 방북증명서 발급 신청서를 쓰게 해 발급한 방북증명서에는 방북기간이 명시돼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무기한 방북자’인 셈이다. 게다가 이씨의 송환은 그가 옛 사회안전법상의 보안감호 처분자로서 34년 동안의 장기구금 상태에서도 전향하지 않고 살아서 북으로 돌아간 최초의 사례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번 송환으로 다른 비전향 장기복역수와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이씨의 송환 실무를 맡아온 통일원의 한 관계자는 이번 조처가 ‘인도적 차원’에서 내린 정치적 결단에 따른 특례일 뿐 다른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문제는 검토한 바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다른 비전향 장기수들에 대한 실태를 파악할 것임을 숨기지 않았다.

 한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 등 재야 단체와 그동안 장기복역 출소자들과 재소자들을 후원해온 종교·인권 단체에서는 이번 이씨의 송환을 계기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장기수들의 송환운동을 벌여나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민가협에서는 자체 집계한 송환 대상자(북한이 고향이거나 가족이 북한에 있는 사람)는 현재 재소자들을 포함해 모두 40명쯤으로 파악된다. 민가협에 현재까지 파악된 장기 복역 양심수(출소자 포함)는 2백20명쯤이다.

 

장기수 실태 세상에 알린 서준식씨

 장기수 문제가 사회 일각에서나마 제기된 것은 88년 서준식씨가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출감하고서부터이다. 이른바 ‘재일동포 형제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원형기 7년과 보안감호 10년을 살고 나온 서준식씨는 당시로서는 최초의 비전향 장기수였다. 서씨는 출감후 민가협에 장기수협의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옥중에서 만난 빨치산 및 남파공작원 출신 장기수들에 대해 비상한 기억력으로 각인해둔 이력과 실태를 하나하나 정리해 세상에 알렸다.

 민가협은 장기복역 양심수(이하 장기수)를 “형법 98조 ‘간첩죄’를 적용받거나 국가보안법, 옛 반공법에 의해 7년 이상 형을 선고 받은 양심수”라고 규정했다. 현재 교도소에는 장기수가 80명쯤 있는데, 대전 광주 대구 전주 안동 교도소에 분산수용돼 있다. 그 중 비전향 장기수(총 37명)의 경우 모두 대전교도소 제15사에 수용돼 있었으나 지난해 이들이 집단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한 뒤로 다른 교도소로도 분산 수용되었다. 출소자를 포함한 이들 장기수들을 시기·유형별로 보면 네가지 틀을 지울 수 있다.

 우선 광복 이후 한국전쟁 휴전 전까지 좌익활동과 관련하여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 주류가 빨치산 활동을 해왔기에 편의상 빨치산 세대라고 부른다. 이들이 재판을 받았던 51년까지의 상황은 “전열 사형, 후열 무기”라는 군사법정의 언도 구령 속에서 잘 드러난다. 빨치산 출신으로 51년 검거된 임방규씨(62세·88년 출소)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검찰관의 구형과 함께 ‘짤카닥’ 하고 실탄을 장착하는 소리가 사형을 당장 집행할 것처럼 들렸다. 사형을 구형받은 포로들이 난동을 부릴까 봐 헌병들이 위협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심경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광주 포로수용소 안에는 그때만 해도 점심 한그릇만 대접해도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말이 파다할 만큼 어수룩한 세상이었고, 정전이 되면 포로 교환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대부분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거나 옥사하였고 유기형은 만기출소했다. 무기를 받은 경우는 4·19 직후 장면 정권이 들어서면서 ‘간첩죄’를 제외한 무기수에 대해 일괄적으로 20년 감형조처를 실시해 60년말~70년초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들을 적절히 관리할 필요성과 이데올로기 탄압의 한 방편으로 75년 사회안전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전향하지 않은 사람들을 청주보안감호소에 재수감했다. “동지들의 이름과 수번 등 총복역자 명단을 ‘살아남은 자의 의무’로써 가슴 속에 각인”한 정치공작원 출신 최남규씨(82세·88년 출소)에 따르면, 14년 동안 보안감호소를 거쳐간 장기수들은 모두 1백55명이다. 이 중 52명이 비전향자이다. 죽거나 전향하지 않고서는 감호처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은 89년 사회안전법이 보안관찰법으로 대체 입법됨으로써 모두 석방된 상태이다.

 두 번째 유형은 이른바 남파 공작원들이다. 이들 중에는 ‘전시 남파’된 군사 공작원 출신도 있으나 대부분은 종전 이후부터 70년대초까지 남파된 정치 공작원들이다. 이들은 또한 대부분 해방 공간 속에서 좌익 활동을 하던 남쪽 출신자들로, 남한에 단독정부가 서고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월북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북한에서 살다가 내려왔다는 점을 빼고는 빨치산 세대와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그러나 이들은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 적용을 받아 ‘모스크바’라고 부르는 대전교도소 제15사 등에서 30~40년씩 옥살이를 하고 있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초장기수’들이다.

 

‘조작 간첩’과 조직 사건

 세 번째 유형은 이른바 ‘조작 간첩’이다. 이들은 70년대 이후 남파 공작원이 뜸해짐으로써 등장한 간첩들이다. 이들은 주로 분단 과정에서 생겨난 월남자나 월북자 및 행불자의 가족, 남북 귀환여부, 재일동포 등이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미 북한과 직간접으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현행 국가보안법상의 ‘국가기밀탐지 ·누석’ 조항이 갖는 애매모호함과 반공우위의 경직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애초부터 간첩으로 만들어질 운명을 안고 태어난 셈이다.

 지난 87년 김병진씨가 쓴 《보안사》라는 책을 통해서 알려진 이 조작 간첩들은 89년 간첩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이례적으로’ 무죄확정 선고를 받은 김성학씨의 수기가 공개됨으로써 처음으로 ‘간첩 조작’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들이 탐지·누설한 국가기밀이라고 혐의사실에 나타난 것은 김포공항 통관절차(김양기), 연세대학교 시위과정(이창국), 경부고속도로가 4차선이라는 사실(신귀영) 등이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짧게는 한달 길게는 석달 동안 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채로 불법구금을 당하여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유신정권 때 들어간 조작 간첩관련자로서 복역중인 사람은 6명밖에 없고 나머지 40명쯤은 모두가 5공 시절에 수감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마지막 유형은 이른바 통혁당 사건, 인혁당 사건, 남민전 사건, 구미유학생 사건 등 조직사건 관련자들이다. 현재 수감중인 장기수는 구미유학생 사건과 몇몇 개별적인 민주화운동사건 관련자들이다. 이들 또한 시기적으로 ‘조작 간첩’과 겹친다는 점에서, 터무니없이 조작된 경우는 아닐지라도 ‘정치적 필요’에 의한 간첩죄 적용이라는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본인들 또한 간첩죄를 부인하고 있다.

 간첩임을 부인하기는 남파 공작원들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3월6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초장기수 이종환씨(72세·41년 6개월 복역)의 사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진짜 간첩’의 문제가 어떤 것인지를 시사해 준다. 지난 51년 군사분계선을 넘다가 체포된 이씨의 임무는 고향(경기도 부천)에 내려가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씨는 처음 육군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대법상의 이적행위죄로 1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1년쯤 뒤에 이씨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육군본부 법무감실은 1심재판을 파기하고 간첩죄를 덧붙여 이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체포되어 호송될 때 눈가림 헝겊 틈새로 군병력 배치상황과 군사시설을 보았다는 것이 간첩혐의였다.

 정부는 지난 3·6 사면에서 처음으로 이종환씨 등 비전향한 장기수 6명을 ‘인도적 차원’에서 석방했다. 현재 수감중인 장기수들의 평균 연령은 이미 60세를 훨씬 넘어 평균 복역 연수가 30년에 이른다. 김선명씨(69세·51년 구속된 남파 공작원)처럼 43년째 복역해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도 있다. 김씨는 아직 총각이다. 김씨는 70세 기준에 미달해 석방에서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는 지난해 집단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 무기수라고 해도 16~18년이면 거개가 다 옥문을 나서는데 왜 이들은 ‘곱징역’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바로 비전향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됨으로써 전향제도의 법적 근거는 없어졌다. 그러나 ‘확신범으로서 그 사상을 포기하지 아니한 자는 모든 행형상의 누진처우 대상에서 제외한다’라고 명시한 법무부령 제111조 수형자 분류처우규칙 제2조 1항 5호와 가석방 분류심사규칙 등이 폐지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전향 공작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어차피 나가시는데 ‘한장’ 쓰고 나가시지요.” 3·6 사면으로 출소한 고성화씨(77세·고정 간첩으로 73년 구속)의 증언이다. 여기서 한 장이란 전향서를 말한다. 고씨에 따르면 70년 중반의 살인적인 전향 공작은 사라졌지만 전향서를 받으면 영전하기 때문인지 교회사들의 전향요구는 집요하다는 것이다.

 

'불순 인물‘ 만나면 1년 이하의 징역

 석방되었다고 전향공작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들의 신분은 석방되자마자 보안관찰법상의 관찰 대상자로 바뀐다.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3개월마다 한번씩 자진해서 경찰에 보고해야 한다. 이들의 생활태도는 2년에 한번씩 갱신하는 보안관찰처분의 판단 기준이 된다. “현재까지 과거의 범행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전향을 계속 완강히 거부하고 있고…국가부안법과 보안관찰법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등… 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므로 보안관찰처분기간을 갱신할 필요가 있음” 최근 서울지검 북부지청의 한 검사가 이세균씨(73세·51년 검거된 인민유격대원)를 대상으로 보안관찰처분 기간 갱신을 청구한 이유서의 한 대목이다. 현행 보안관찰법은 ‘불순 인물’(산중 또는 옥중 동지)을 만나는 등 법규를 위반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은 전향하지 않는 한 수십년 간의 0.8평 독거생활에서 세상이라는 ‘더 큰 감옥’으로 자리만 바꾸는 것일 뿐이다.

 이인모씨가 송환되는 날 이씨의 한 옥중동지는 이렇게 말했다. “남한에서 장기 복역 양심수는 한번도 ‘석방’된 적이 없다. 이제 비로소 처음으로 한 명이 석방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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