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병’ 근원 드러났다
  • 김동선 (편집국장 대우) ()
  • 승인 2006.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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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놀라운 사실은일부 공직자와 국회의원이 재산을 실제보다 축소하려 안간힘을 썼다는 점이다.”


 百萬長者(Millionaire)는 미국에서 매우 큰 부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는 1백만달러 재산가를 뜻하는 말이었지만, 요즘은 그 이상의 부자까지 포함하여 큰 재산가를 통칭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자유경쟁 원칙과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저마다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미덕이고, 미국에서 백만장자는 사회적으로 상당한 대우를 받게 되고, 그 재산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백만달러를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겨우’ 8억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돈을 벌려고 이를 악물고 바득바득 발버둥쳐도 평생 8억원을 모으기는커녕 그날그날 살아가기도 힘든 사람들에게는 8억원 앞에 ‘겨우’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 ‘약 올리는’ 언사로 해석될지 모르지만, 공직자와 국회의원들의 재산공개를 대하고는 8억원앞에 어쩔 수 없이 ‘겨우’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다. 총리를 포함하여 장관급 공직자와 청와대 비서진 42명 중 20명이 8억원대 이상의 재산가이고, 민자당 국회의원과 당무위원중에는 물경 59명이 백만장자이고 보니 8억원 앞에 ‘겨우’를 붙이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거지 나라인지, 아니면 우리나라가 부자나라인지 헛갈리는 것은 비단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권력은 돈 만들어내는 도깨비 방망이

 더욱 놀라운 일은 우리나라 공직자와 국회의원 중에서 드러난 백만장자 숫자가 그 정도밖에 안되는 것은 재산을 줄여서 공개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재산을 시세가 아닌 공시가격이나 기준시가로 산정했고, 주식가격도 액면가를 써냈다는 것은 이미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이들의 재산 규모는 실제로는 공개한 총액의 3~4배에 이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실사를 하지 않는다는 방침 때문에 ‘감춰진’ 재산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무성하게 나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장관급 공직자는 거의 모두가, 여당 국회의원은 태반이 백만장자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백만장자들이 지배하는 국가인 것이다.

 지난 대통령선거 기간에 정주영씨는 양김씨가 재산을 공개하자 “구멍가게도 안해본 사람들이 왜 그리 재산이 많은가”라고 양김씨의 재산형성 과정을 문제삼으며 신랄하게 공격했었다. 대선 패배 이후 야릇한 행각 때문에 정주영씨의 모든 발언은 이제 허공에 묻혀 버렸지만, 적어도 구멍가게도 안해본 사람들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질타 자체는 매우 타당하다.

 12·12 주역이었으며, 안기부장을 지낸 유학성 의원은 65억이라는 재산을 공개했고, 야당에서 출발하여 40년 가까이 정치만 해 온 박준규 국회의장의 재산은 41얼8천만원이다. 5공시절 언론계에서 정계에 투신한 최아무개 의원은 25억, 육군 대령으로 12·12에 가담하여 5공초기 실세였던 허 아무개 의원은 18억원이고, 그의 동료인 또다른 허씨는 12억원. 이것도 ‘조정’을 했다는 후문이 있고 보면 입이 절로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이 돈 만들어내는 도깨비 방망이인지, 좌우간 권력 주변에서 10여년 맴돌면 백만장자가 되는 게 우리 현실이다.

 민자당의 姜在涉 대변인은 소속 의원과 당무위원들의 재산 공개에 맞춰 “현재의 재산상태에 대한 흥미 위주보다 앞으로 재산변동 상황의 국민적 감시기능 확보라는 측면에서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호소했다.

 

‘실사’는 물론 재산에 걸맞게 세금 냈는지도 조사해야

 그러나 이 호소에 공감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공직자와 정치인의 재산 내용을 훑어 보면, 납득이 안되는 부분이 많아 무슨 암호문을 해독하는 기분이 앞선다. “야, 이사람 선비인 줄 알았더니 웬 땅이 이리 많아”하는 반응, 부동산 투기의혹이 있는 어떤 장관 부인의 승용차가 86년형 프라이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자동차 바꿔친 거 아냐”라는 말들이 튀어나오고, 김대통령도 지적했듯이 언론인과 재야 출신 인사의 재산이 많은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 언제, 무슨 수로 그렇게 재산을 모았는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상속을 받았다’는 해명이 있었지만, 이 변명에 공감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의혹어린 뒷말과 함께 개탄의 소리도 많지만 김영삼 정부의 재산공개 단행은 개혁이 이루어낸 쾌거이다. 재산에 대한 실사를 하지 않는다는 방침 때문에 공개내용이 부실하지만 공개 그 자체는 획기적인 조처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공직자와 정치인 들의 재산 내용 속에 ‘한국병’의 본질적 근원이 어디있는지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구멍가게도 안해본 사람들이 재산가가 되고, 유망 중소기업 사장은 자살하는 현실이 계속되는 한 한국병 치유는 요원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문제 삼지 않겠다’는 발상은 병의 뿌리를 놓아두겠다는 의미로 들린다. 병의 뿌리를 찾아냈다면 그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 바른 치유방법이라는 것은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는 진리이다.

 그 백만장자들의 재산에 대해서는 ‘실사’와 함께 그동안 세금을 얼마나 냈는지 조사하는 작업을 병행해야 이 획기적인 조처가 국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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