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정치 조직으로 변하나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6.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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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헤이든 국장 내정자, 부시 대통령과 ‘지나치게 가까운’ 사이

 
“미국 정부 기관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조직인 만큼 운영하려면 좀 별난 천재가 필요할 것이다.”

약 40년 전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가리켜 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창설된 지 60년이 지난 중앙정보국은 국장 자리를 거쳐 간 인물이 지금까지 18명에 달하지만, 임기를 무사히 채우고 제발로 사퇴한 사람은 거의 없다. 거개가 대통령의 눈 밖에 나 경질되었거나 직무에 대한 중압감 또는 좌절감을 견디지 못해 중도에 물러났다.

지난 5월12일 전격 사임한 포터 고스 중앙정보국장(67)의 경우도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004년 6월 전임 조지 테넷 국장이 업무에 대한 중압감을 이유로 전격 사퇴한 뒤, 그의 뒤를 이어 고스 국장은 기세등등하게 입성했지만 취임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사임했다. 그의 사임을 놓고 워싱턴 조야에서는 ‘중앙정보국의 환골탈태를 위한 포석이다’, 혹은 ‘중앙정보국을 포함한 연방 정부 내 18개 정보기관을 관할하는 국가정보국과의 마찰을 줄이기 위한 조처다’ 같은 해석이 분분하다. 고스 자신이 사임 이유를 밝히지 않아 의혹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을 보면 고스 국장은 타의로 물러난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는 취임 당시 중앙정보국 간부들과의 회동에서 “이 나라 최고의 정보기관 수장이자 신설될 반테러 전국본부 책임자로서, 또한 대통령에 대한 최고의 정보 브리핑 담당자로서 중앙정보국의 위상을 강화하겠다”라며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그는 취임하자마자 베테랑 간부들을 줄줄이 사퇴시킨 뒤 비정보통 측근들을 대거 간부 직에 임명하는 등 정실 인사를 단행해 구설에 싸이기 시작했다. 그의 취임 직후 줄사표를 낸 사람들 가운데는 존 매크롤린 부국장, 서열 3위인 크론가드 집행국장, 핵심 부서인 작전국의 최고참 간부였던 스티븐 캡스, 마이클 설릭 등 조직 내에서 존경을 받아온 고위 간부들이 두루 포함되었다.

당시 중앙정보국 간부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미국 하원 정보위원회의 민주당측 간사인 제인 하먼 의원은 “고스가 취임한 지난 1년 반 동안 모두 합치면 3백년의 경험을 가진 베테랑 간부들이 좌절 속에 옷을 벗었다”라고 지적했다.

고스는 이런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과거 하원 정보위원장 시절 자신을 수족처럼 따르던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다. 그 중에는 군수납품 업자로 현재 뇌물 수수 사건에 연루된 브렌트 윌크스 비리 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고 있는 카일 포고 집행국장도 들어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부시 행정부의 대이라크 정책과 관련한 치부가 중앙정보국 현직 간부들을 통해 잇따라 언론에 누설된 것도 고스 국장의 퇴임을 재촉한 것으로 보인다. 고스 국장은 기밀 누설 방지 등 내부 단속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최근 감찰국에 근무하던 매어리 매카시를 파면시키기도 했지만, 이미 때를 놓친 상황이었다.

고스 국장의 전격적인 사임을 몰고온 또 다른 요인으로는 부시의 단단한 신임과 총애를 받고 있는 존 네그로폰테 국가정보국(NIS) 국장과의 오랜 불화가 꼽힌다. 고스는 중앙정보국을 포함해 기존의 정보기관을 대폭 재편하려던 네그로폰테 국장과 잦은 마찰을 빚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정보국은 ‘9·11 테러 사건’의 진상 조사를 위해 초당적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지난해 신설된 수퍼 정보기관이다.

당시 특별위원회는 특히 중앙정보국이 9·11 테러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정보를 취득하는 데 실패했을뿐 아니라,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정보 평가를 잘못했다고, 통렬히 비판하며 정보기관의 대대적인 재편을 권고한 바 있다.

 
 고스는 지난해 국가정보국이 탄생한 뒤에도 중앙정보국의 고유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연방 정부를 위한 정보 평가 업무만큼은 빼앗기지 않으려 격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국가정보국이 이런 기능을 도맡게 된 것은 물론, 국가정보국장이 중앙정보국장을 대신해 대통령에게 일일 정보브리핑을 맡게 되었다. 한마디로 고스의 중도 퇴장은 과거 오랜 세월 최고의 정보 수집과 분석을 자랑해오던 중앙정보국이 국가정보국의 탄생을 계기로 그 위상과 역할이 약화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네그로폰테, 럼스펠드 견제 위해 헤이든 지원

 부시 대통령은 고스의 후임으로 공군 장성 출신인 마이클 헤이든(61)을 지명한 상태다. 그는 최근까지도 네그로폰테 국가정보국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부국장직을 맡아왔다. 헤이든은 과거 현역 장교 시절 유고슬라비아와 한국에서 근무할 때와 미국 국방부 본부에서 정보 관련 업무를 했던 경험이 있다.

또 현 부시 대통령의 부친이 대통령을 지내던 1980년대 후반 국가안보위원회에 파견되어 당시 콘돌리자 라이스 유럽담당국장과 함께 일한 경험도 있다. 네그로폰테 국장이 중앙정보국 부국장에 고스 치하에서 숙청당한 스티븐 캡스를 복귀시킨 것도 헤이든의 운신 폭을 넓혀주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민간인 출신이 맡아온 중앙정보국 수장 직에 군 출신인 헤이든을 앉히는 것이 적합한지 여부를 놓고 벌써부터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과거 중앙정보국 국장 가운데 군 출신 인사가 없지는 않았지만, 지난 25년간 모두 민간인 출신이 임명되어왔다. 일부 간부들은 그가 고스 국장 치하에서 만신창이가 된 조직을 수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표시하고 있지만, 그가 중앙정보국 개혁을 위해 칼날을 벼려왔던 네그로폰테 국장의 최측근이라는 점에서 내심 불안해하는 기색이다.

게다가 그가 군 출신임을 감안할 때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같은 우려에 대해 네그로폰테 국가정보국장은 “헤이든 장군이 취임 첫날부터 매우 독자적인 행보를 보일 것이다”라고 자신감을 표시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와 관련해 네그로폰테가 헤이든을 선택한데는 정보 영역의 확대에 여념이 없는 럼스펠드 장관을 견제하기 위한 속셈이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실 국방부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모든 정보기관 예산 중 80% 이상을 관할한다. 국방부는 산하에 해외도청 업무를 전담하는 국가안보국과 정찰 업무를 전담하는 국가정찰국 등 방대한 정보 조직을 두고 있다.
 
헤이든 지명자가 곧 당면하게 될 가장 큰 걸림돌은 상원 인준 청문회다. 그는 과거 국가정보국 부국장 시절 국내 도청을 지지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미 민주당 의원들은 물론이고, 우군인 공화당 의원들마저 그가 미국 내 외국인은 물론 심지어 미국 시민들에까지 테러 방지를 명분으로 무차별 도청을 허용한 비밀 계획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실제로 비밀 도청을 허용한 최고 책임자가 부시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 지난해 드러나면서 백악관이 곤혹스러운 입장에 빠지자 헤이든은 백악관 입장을 적극 두둔해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일각에서는 헤이든이 백악관측과 너무 가까운 정치적인 인사라는 점에서 전통적으로 정치적 독립을 자랑해온 중앙정보국이 그의 치하에서 정치적 조직으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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