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을 줄 모르고 뜨거운 ‘감자 전쟁’
  • 부에노스 아이레스 · 손정수 통신원 ()
  • 승인 2006.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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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칠레, 문화적 자존심 내세우며 “우리가 원조” 주장

태평양 연안 안데스 산맥을 타고  위아래로 이웃한 페루와 칠레가 감자를 놓고 이색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다.

역사적으로 두 나라는 여러 면에서 경쟁해왔다. 지난해 말 페루의 알레한드로 토레도 대통령이 남부 접경 수역 3만5천km²에 대한 어로권을 공포하면서 일어난 국경 분쟁도 강한 라이벌 의식의 소산이다.  2002년 피스코(Pisco)라 불리는 안데스 특산 포도주(프랑스의 샴페인·포르투갈의 오포르토에 해당하는 지역 특산. 잉카제국이 귀한 제주로 사용한 포도주)를 놓고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감자를 놓고 또다시 양국이 논쟁을 벌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현재 두 나라는 ‘누가 감자 원조냐’를 놓고 문화적 자존심까지 걸고 맞서고 있다.
  논란은 칠레 남부 치올레 섬에서 재배되는 감자 종류(약 2백80종)를 조사했던 한 칠레 농대 교수가 이를 국가 문화재로 등록하려고 한 데서 점화되었다. 이에 발끈한  페루 외무장관(오스카르 마우르투아)은 “아주 오래 전 페루 남부에서 감자가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전국적으로 번식·개발되어 오고 있는 만큼 페루는 이를 보호하기를 원한다”라고 맞섰다. 일종의 종자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페루 외무장관은 덧붙여 “함부로 이를 무시할 경우 벌금을 물게 하겠다”라고 위협했다.

페루 정부는 작년 의회로부터 감자 관련 보호법을 승인받고 감자 원산에 대한 국제 특허를 신청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페루의 요청으로 실시된 미국 농무부의 연구 보고서를 흔들며 이 문제를 국제연합(유엔)에 까지 상정하겠다고 단호한 자세를 보였다.
 
감자 원조 논쟁에 불을 붙인 이는 칠레의 아우스트랄 농대 교수  안드레스 콘트레아스. 그는  “감자가 페루 남부 지방이 원산지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나, 칠레 영토에 속한 치올레 섬에서 재배되는 감자는 칠레산이다. 이를 칠레의 유산으로 문화재로 등록하려 했던 것일 뿐이다”라고 항변하며 페루 당국의 완강한 태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페루, 칠레가 ‘문화재’로 등록하려 하자 발끈

미국 농무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감자는 잉카제국 이전 7천 년 전부터 해당 지역 원주민에 의하여 재배되었다. 따져보면 피스코나 감자 원산지에 대한 양국의 논쟁은 결국 잉카제국 유산이 스페인에서 해방된 후 페루와 칠레로 양분된 안데스 판도 속에 애매해진 데에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에 칠레와 페루로 각각 독립하면서 양국은 여러 문제로 충돌했다. 19세기 독립 무렵에 ‘태평양 전쟁(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과는 다름)’이라는 무력 분쟁으로 페루는 남부 해안 일부를 칠레에게 빼앗긴 뼈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이처럼 양국은 태양 제국 잉카의 후손이라는 공동의 자긍심을 가지면서도, 역사적으로 경쟁해온 사이인 것이다.
 
최근에는 여기에 칠레의 해커까지 가담했다. 페루가 공동 수역 논란이 있는 바다에 어로권을 공포하자, 지난해 페루 법무부 웹사이트에는 수많은 반(反)페루 글이 올랐다. 그 중에는 ‘우리 것을 위하여 투쟁하자!, 태평양과 피스코는 칠레의 것!’이라는 글도 있었다.

미 농무성의 조사로 페루 원산으로 판명된 피스코에 대한 분쟁이, 해외 수출에 의한 통상 측면에서 발생했다면(피스코를 해외 시장에 수출한 칠레 업체가 ‘칠레 특산’으로 표기), 감자 원조 논쟁은 좀더 근원적인 의미를 가진다.

감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페루에서는 단순한 주식 농작물 이상의 문화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감자의 기원에 대한 전설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감자 재배를 둘러싼 미신적 금기 사항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잉카가 남겨준 위대한 유산으로 감자 원산국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페루는 감자 개발을 홍보하기 위한 자체 웹 망을 구축하기도 했다. 바로 이 때문에 칠레의 ‘도발’은 한층 더 페루의 문화적 자존심을 긁는 문제가 되었다.

감자를 둘러싼 금기는 감자를 신이 내린 음식으로 생각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식량 재배를 주도하며 안데스 고산 인디언 부족을 지배했던 인디언 세대들이 사망하고 후손들이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하늘에 제를 지내 얻어진 것이 감자였다는 것이다.
  페루 사람들은 감자 잎이 누렇게 될 무렵, 다른 부족의 침략으로 감자를 강탈당하자 다시 제사를 지내 하소연했다. 그 결과, 신이 ‘감자를 심었던 자리를 더 깊이 파보라’고 말했고 이 계시에 따라 해보았더니 땅 속에 굵은 감자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근을 면하고 힘을 회복한 인디언들이 침략자를 무찌르고 평화를 회복했다는 것이 감자를 둘러싼 전설의 골자이다. 그로부터 감자는 인디언들의 중요한 생명줄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등록된 종류만도 수천 종에 달하고 세계 각처에서 밀, 쌀, 옥수수 다음으로 많이 재배되고 있는 식량 작물이지만,  고산 생활을 했던 당시 안데스 인디언에게 감자는 생존과 직결된 농작물로 재배가 신성시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금기 사항이 생겨났다. 예를 들면 ‘감자를 심을 때 여자들이 있으면, 흉년이 든다’거나, ‘씨감자를 심을 때는 그 씨감자가 보이지 않도록 반드시 등 뒤로 심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이는 이웃 부족의 약탈에 대비한 비밀 보장책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저칼로리 식품으로 알려진 뒤 감자 중요성 더 부각

감자의 중요성이 새삼스럽게 부각되는 것은 식량 사정이 어려운 북한만이 아니다. 미국 농무부가 “신선한 우유와 감자만으로도 체력 유지에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공급받을 수 있다”라고 보고한 뒤, 감자 원산지인 남미에서도 감자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
 
일반적으로 감자를 칼로리가 높은 전분 식품으로 생각하지만, 미국 농무부의 연구 결과를 보면 감자는 저칼로리 식품에 속한다. 감자가 비만 식품이 아니라 정맥미보다도 훨씬 낮은 저칼로리 식품이라는 사실은 주의를 환기시키기에 족했다.

 
감자는 육식을 주로 하는 현지인(원주민 인디언과 이주해온 유럽계 등)들의 식단에서 빠지지 않는다. 산성이 강한 고기류 또는 유제품과 영양 균형을 맞추는 비타민이 많은 알칼리성 식품이기 때문이다. 감자 요리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구운 쇠고기와 닭고기와 곁들인 ‘파파 알 오르노’(화덕에 구운 감자)와 각종 ‘기소’(스튜 요리), 야채 샐러드, 감자 튀김, ‘휘데오 콘 에스토파도’(국수와 토마토로 양념한 삶은 고기), 각종 고기와 ‘푸레 데 파파’(갈아서 삶은 감자) 등 그 종류가 셀 수 없이 많은 것이다.

특히 볼리비아에서 생산되는 ‘추니오’라는 감자는 개량종 감자보다 작고  못생겼으나 맛이 남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휘데오 콘 츄니오’(토마토 양념으로 삶은 추니오와 스파게티)의 감자는 일반 감자와는 달리, 간 밴 쫄깃쫄깃한 맛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권할 만하다. 이 감자는 기압이 낮은 고산 지대 바위 틈에서 재배된다고 한다. 한국 식품점을 찾는  한국 교포처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볼리비아 사람들은 추니오를 즐겨 찾는다.

이처럼 남미 사람들이 두루 즐기는 감자를 서로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페루·칠레의 감자 싸움이 종식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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