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 폐허 유고에 평화 기운 감돈다.
  • 부다페스트·김성진 통신원 ()
  • 승인 2006.05.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UN·EC 화전 양동작전으로 평화안 ‘파란불’



 2차대전 이후 최대의 난민 양산 기록을 세우며 악화일로를 치달려온 유고 내전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유엔과 유럽공동체(EC)가 함께 내놓은 평화안에 각 분쟁 당사자가 모두 서명할 가능성이 높고 주변 여건도 어느 때보다 무르익고 있다. 이 평화안이 발효할 경우 희생자 12만과 난민 3백만명을 낸 어처구니 없는 내전은 실질적으로 종결되며 평화 보장을 위한 후속 절차가 뒤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9월부터 본격 중재에 나선 밴스 유엔 특사와 오웬 유럽공동체 특사가 함께 마련한 이 평화안은 국제적인 무력 개입을 전제로 한 마지막 평화협상이라는 점 때문에 안팎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평화안은 헌법 구조, 무력 분리, 10개 자치주를 중심으로 한 분할자치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새 헌법 구조는 보스니아에 단일 주권국가를 유지할 상징적인 의미의 중앙 정부를 세워 인종간 균형을 맞추는 대신 실질적인 행정기능은 모두 지방자치주에 넘긴다는 내용이다. 평화의 실질적인 관건인 무력을 분리하는 방안은, 보스니아내 3개 분쟁 당사자의 무력을 국제감시 아래 두는 것이다. 이 부문에 대해 그동안 세르비아측은 유엔의 감독 아래두자고 주장했고, 세르비아측을 믿지 못하는 회교도측은 좀 더 강제력을 부여한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빚어왔다.

 평화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분할 자치안은 각 지역의 민족 분포도를 기준으로 세르비아?크로아티아?회교도가 각각 3개씩 자치주를 새로 설치하고, 중앙 정부가 자리할 사라예보를 개방 도시로 하는 대신 수도 주변 지역을 공동자치주로 만들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히 각 자치주는 행정?사법?경찰 기능을 각각 수행하는 국가 성격을 띠고 있지만 “국제법상 국가 성격을 가질 수 없고 외국과 협정도 맺을 수 없다??는 단서를 붙여 놓았다. 이는 새 보스니아 국가 안에 외교권을 가진 세르비아 자치국을 만들려는 세르비아측 입장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으로, 앞으로 세르비아측 자치주가 임의로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유고연방에 가담하는 것을 막으려는 제도적 장치로 해석된다.

 

 세르비아, 경제난?무력 제재 위협에 곤경 

 이 평화안은 지난 1월 제네바 평화회의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었으나, 어부지리로 새영토를 획득할 기대에 부푼 크로아티아로부터만 서명을 받은 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보스니아 내전의 최대 피해자인 회교도측은 이 조처로 세르비아측의 인종 청소가 국제법적으로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를 고착화한다는 이유로 반대했었다. 또한 세르비아측은 이미 보스니아 영토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안을 받아들일 경우 장악한 영토 가운데 30%를 다시 양보해야 하는 데다 대세르비아를 형성하는 데 주춧돌이 될 베오그라드와의 합병마저 제도적으로 봉쇄당할 수 밖에 없다는 이유로 강경한 반대 입장을 고수했었다.

 이같은 각자의 분명한 입장 차이 때문에 오웬과 밴스 두 특사를 사실상 평화협상이 실채했다고 선언했고 평화협상은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었다. 그러자 유엔 안보리측이 필요한 군사 조처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세르비아측 대표 라보단 카라지치는 평화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시사하면서 한걸음 물러섰다. 카라지치는 유고내전의 ‘대부??인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의중을 직접 전달받아 입장변화를 보인 것으로 보인다.

 밀로세비치는 일단 현재의 영토 확보로 대세르비아주의를 형성할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앞으로 논란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세르비아 점령 크로아티아 영토를 처리하는 데서도 이러한 전례를 동원해 반사이익을 얻어낼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산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난해 5월 이후 계속되는 경제 제재로 세르비아 국민의 불만이 누적돼온 현실에서 결정적 타격이 될 국제 무력개입을 초래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밀로세비치가 절대적인 영향력으로 언론을 조종함으로써 세르비아 국민의 조직적인 동요는 없는 상태이지만 경제는 그야말로 파탄 상태에 가까운 것이 베오그라드의 현실이다. 인플레는 악화돼 날마다 4%씩 물가가 치솟는 상태이며, 근로자들의 한달 수입은 3년전의 하루 수입밖에 안되는 평균 17달러로 떨어져 어린이 7명 중 1명 꼴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오랜 병에 효자가 없듯 이같은 경제파탄이 지속될 경우 밀로세비치가 권력 유지 기반으로 악용하고 있는 ‘대세르비아를 향한 집단적인 편집광??이 잘 먹혀들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회교도측 ‘평화안??서명했으나 철회 가능성

 때맞춰 등장한 빌 클린턴 행정부는 세르비아측을 평화안에 묶어두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선 클린턴의 참모들은 오웬?밴스 평화안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는 점을 누누이 역설했으며 여의치 않을 경우 지상군을 포함한 미군 투입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을 세르비아측에 정확히 전달했다. 이 역할을 직접 수행한 인물은 클린턴이 개인 특사로 파견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주재 미국대사 레지널드 바솔로뮤였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세르비아측과 우호 관계를 다져온 러시아는 유리 보론초프 유엔대사의 입을 통해 평화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러시아의 입장을 천명했다.

 제네바 평화회의 이후 두달 만에 속개된 뉴욕회담은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해 회교측 대표인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의 서명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세르비아측 카라지치 대표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국회??와 협의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직 평화안 서명을 유보하고 있다.

 이제트베고비치 회교도 대표는 3월28일 자그레브 공항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가운데 카라지치측에 유예기간을 열흘 주었으며, 만약 이 기간에 세르비아측이 서명하지 않을 경우 자기네도 서명을 철회하겠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이에 따라 세르비아측의 서명을 받아내기 위한 강력한 외교 압력이 밀로세비치와 카라지치에게 가해지고 있다. 이제크베고비치는 또 프라뇨 두디만 크로아티아 대통령과 회담을 마친 뒤 별도 기자회견을 통해 크로아티아 방위군과 회교도 방위대를 중심으로 하여 보스니아 공화국군으로 개편하기도 하고 향후 양측이 공동 편제를 가진 군대로 발족하는 데에도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평화 관건, 세르비아 민병대 무력화

 이에 앞서 3월26일 정오에 발효된 정전협정으로 현재 보스니아 전선은 전반적으로 소강상태이다. 특히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군 지도자인 라트코 믈라디츠는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 필리페 모리용 프랑스군 사령관에게 유엔측 수송로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만약 세르비아측이 평화안에 서명하게 되면 각 전투 당사자들은 45일 안에 전투 현장에서 철수해야 한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와 때맞추어 현재 옛 유고 지역에서 활동중인 유엔 평화유지군 2만2천5백명과 함께 북대서양조약기구 소속 6만4천명이 추가로 파견되어 평화유지활동에 나설 것이라고 보도했다.

 따라서 세르비아측이 평화안에 서명한다면 보스니아의 진정한 평화는, 명목상이긴 하나 보스니아가 단일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평화유지군과 나토 소속군이 강력한 세르비아 민병대의 전력을 어느 정도까지 제어할 수 있을지 두 가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