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 길러 놓고 개혁 칼 댄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2006.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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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 당장 시행엔 체질 너무 허약…“경기부터 살려 놓자”



 낡은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으려고 했다가 새 가구만 들여놓은 셈이다. 3월22일 ‘신경제 1백일 계획??을 발표한 후 金永三 대통령이 표방해온 ??신경제??가 처한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신경제는 정부의 지시나 통제보다는 국민의 참여와 창의력을 중시하겠다는 구상이다. 朴在潤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 기획 회사에 의뢰해 이 이름을 구했고, 표기도 굳이 ‘新경제??로 통일할 것을 고집해왔다. 70년대 중반 이후 많은 경제학자들이 가장 중요한 경제 개혁 과제로 꼽아왔으면서도 한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는 민간 주도 경제 체제를 제대로 실천해보겠다는 것이다.

 반면에 1백일 계획은 침체된 경기를 일단 살려 놓고 보자는 경기부양책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공금리를 추가로 내리고, 통화를 확대하며, 재정을 예정보다 일찍 집행할 계획이다. ‘고통 분담?? 차원에서 공공요금과 개인 서비스 요금 인상도 막을 방침이다. 경제활성화 대책에 강력한 물가 통제라는 모순된 정책이 덧붙였다. 이 계획은 신경제의 본 뜻과는 달리 정부가 다시 경제의 ??고삐??를 쥐고 경제활력을 꾀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1백일 계획은 경기부양과 개혁 병행??

 1백일 계획이 나오게 된 것은 경제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근 확정된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4.8%로, 예상을 훨씬 밑도는 수치였다. 현기증을 느낄 정도의 고속 성장에 익숙한 우리 정부로서는 불만스럽기 그지없다. 1백일 계획을 발표한 지 이틀 뒤 박재윤 경제수석은 서울대에서 행한 고별강연에서 “작년부터 본격화한 경제 침제 현상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경기 침체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라는 것이다.

 91년 후반기부터 총수요관리를 통해 안정화 정책을 주도해온 경제기획원의 현실 인식도 급선회했다. 지난해 하반기 경제성장률이 3%에도 못미쳤던 것은 안정화 정책이 지나쳤기 때문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경제 개혁을 논의하다간 자칫 경제의 숨통을 끊어놓을지도 모르겠다는 우려가 나왔다. 경제기획원의 張?? 기획국장은 “경제개혁을 하려면 경제의 체질이 어느 정도 강화돼 있어야 한다??고 말해 경제 활성화 대책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재윤 수석은 고별강연에서 ??침체한 경제를 단기간에 회복하는 것은 경제 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개혁은 다시 뒷전으로 밀려났다. 금융실명제 논의가 사라졌고, 금융계 판도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금융산업개편안에 관한 공개적토론도 늦춰질 전망이다. 금융산업개편 시안을 만든 한 연구자는 “지금은 금융 개혁을 얘기할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원래는 금융산업발전심의회(위원장 具本湖) 산하 제도개편연구 소위원회의 연구가 끝나면 심의회 전체회의에 회부될 예정이었다.

 물론 1백일 계획이 경제 개혁을 전적으로 외면한 것은 아니다. 정부는 7개 경제 단체를 비롯한 민간 단체에서 건의하거나 각 부처가 선정한 행정규제 6백70개를 개선하고, 공직자의 의식개혁 운동을 주도할 예정이다. 특히 행정규제 완화는 그동안 말만 무성했다 흐지부지됐다는 점을 의식해 이번에는 각 부처 장관이 책임지고 대통령이 직접 챙기기로 했다. 이 때문에 경제기획원은 1백일 계획을 단순한 경기부양책이 아니라 개혁과 병행하는 활성화 대책으로 간주해달라고 주문한다.

 새 경제팀은 1백일 계획을 통해 경제가 살아나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 계획의 목표는 경제성장률을 잠재성장률 수준인 6~7%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경제기획원은 1백일 계획으로 2/4분기부터 경기가 나아져, 하반기에는 목표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해서 국민의 신뢰를 얻게 되면 원래 예정했던 신경제 구상인 경제 개혁에 착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1백일 계획은 신경제 구상을 일종의 변형된 안정화 정책으로 여겨온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안정화정책을 고수하려던 調 淳 한국은행 총재를 경질한 것은 정부가 안정화 정책을 완전히 포기한 것으로 비친다. 당시 조순 총재를 경질하기로 한 청와대의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 애썼던 한 교수는 조총재를 바꾸어야만 한다는 결심이 너무나 확고한 것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 박재윤 경제수석은 지난해 《시사저널》과 인터뷰하면서 자신이 ‘안정론자??로 분류되길 원한다고 밝혔었다.

 안정론자들은 1백일 계획에 대해 섣부른 경제활성화 대책을 폈을 때의 부작용을 경고해왔다. 노태우 대통령이 90년 당시 조순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를 경질하고 실시했던 ‘4?4 경제활성화 대책??은 물가 급등과 부동산 투기를 불러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1백일 계획에는 임금 안정과 생필품 가격 동결을 비롯해 물가안정을 위한 대책이 포함돼 있긴 하지만 경제 활성화에 훨씬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산적한 경제개혁 외면 불안

 20여년간 미뤄져온 경제 운용체체를 바꾼다는 의미에서 신경체 구상은 새로운 구상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경제 운용체제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이미 형성돼 있는 만큼 과감하게 실천하겠다는 점이 과거와 다르다. 과거에도 줄곧 민간이 주도하는 경제운용 구상이 나온 적이 있지만 정치가 민주화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경제 5개년 계획은 1백일 계획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徐相穆 민자당 제2정책조정실장은 한 외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신경제 1백일 계획은 단지 단기적인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신경제 구상에 일조해온 그는 구상의 본질이 더 빠른 자유화(liberalization)를 지양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경제 5개년 계획에는 아무래도 신경제 구상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왔던 박재윤 경제수석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게 될 것 같다. 앞으로 1백일간 신경제 5개년 계획을 구체화하게 될 ‘신경제계획위원회??(공동위원장 金英泰 경제기획원 차관, 朴英哲 금융연구원장)에 민간 전문가 자격으로 참여한 인사들 가운데는 서울대 경제학과의 姜光夏?鄭英一 교수가 포함돼 있다. 이들은 92년 6월 박재윤 경제수석이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제특보로 참여했을 때 신경제 구상에 공동참여했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만든 신경제 구상을 뼈대로 5개년 계획을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은 경제 제도의 대폭 개편이나 시장 개방을 중심으로 한 개혁과제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신경제 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금융 자율화와 금융 시장 개방이다. 화폐금융론을 전공한 경제학자답게 박재윤 경제수석은 금융 분야의 개혁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금융자율화라는 대전제를 위한 금융 개혁 청사진은 금융 산업 개편 시안이 금융산업발전심의회의 공개 토론에 부쳐지는 순간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정책이긴 하지만 금융실명제도 금융 개혁의 핵심적인 내용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박재윤 경제수석은 고별 강연에서 “금융실명제를 반드시 실시한다??고 강조해 금융실명제가 어떤 형태로든 신경제 5개년 계획에 반영될 것임을 시사했다.

 경제 행정조직 개편도 핵심적인 개혁 과제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부분적으로 개편하기는 했지만, 아직 핵심적인 경제부처는 손을 대지 못한 상태다. 정부는 이미 2차 개편을 예고한 바 있으며, 충격을 최소화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정부 투자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고, 세정을 개혁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96년께로 예정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앞두고 거의 모든 시장의 개방을 완료해야 하는 것도 핵심적인 경제 개혁 과제다.

 신경제 1백일 계획은 이런 경제 개혁을 위해 우선 경제를 조급하게 희생시키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그러나 경제를 한때 반짝하게 만들어야만 한다는 정치적 동기는 산적한 경제 개혁을 자주 외면하게 할 가능성도 있다. ‘새 집??(신경제)을 짓겠다는 구상과 관련해 가장 불안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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