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정치 인생 시작
  • 이흥환 기자 ()
  • 승인 2006.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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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룡 장관, YS 대통령 만들기 23년의 ‘실세 중 실세’


 ‘그 누구도 김덕룡을 대신할 수는 없다.’ 민자당 서울 서초을지구당의 김덕룡 정책연구소가 당원 교육을 위해 만든 의정보고서 첫머리에 인쇄된 글귀다. 새 정부 출범과 더불어 실세라고 평가받는 김덕룡 정무1장관의 하루 일과를 좇다 보면 이 표현 속에 감추어진 김장관 나름의 자심감을 엿볼 수 있다. 누구도 김덕룡을 대신할 수 없다고 장담하는 배경은 무엇인가.

 도대체 그는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하루 세끼 중 단 한번도 집에서 밥을 먹는 법이 없이 밖으로만 돈다. 하루 24시간 중 서울 서초동 롯데빌라의 시가 7억원짜리 집에 머무는 시간은 오전 1시에서 새벽 5시30분까지 고작 네시간 30분 간이다. 정무장관실의 수행비서도 두 손을 들 만큼 그는 안가는 데 없이, 안 만나는 사람 없이 돌아다닌다.

 김장관은 새벽 5시30분에 집을 나선다. 집부근에 있는 우면산을 올라갔다 내려오면 6시30분. 7시까지의 30분 간은 출근하는 시간이다. 월.수.금요일은 여의도의 민자당사로 출근한다. 월요일에는 확대당직자회의, 수요일에는 고위당직자회의와 당무회의, 금요일에는 고위당직자회의에 참석한다. 오전중에는 대개 당사에 머무는 것이 관례다. 화.목.토요일은 정부종합청사로 출근한다.

 

사무실 5개, 하루20~30명 만나

 민자당이나 정부종합청사에 도착하는 시간은 아침 7시. 사무실로 가기 전에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곧바로 목욕탕으로 직행한다. 하루 일과 중 빼놓을 수 없는 시간이다. 김장관의 목욕탕 일과는 유명하다. 여의도 당사에서는 국회 앞의 금산탕, 정부 청사로 출근할 때는 뉴국제호텔 사우나탕, 지구당에서는 한성탕을 애용한다. 50분 가량 목욕탕에서 보내고 나면 9시 출근 시간까지 한시간쯤 공백이 생긴다. 이 한시간 동안 김장관은 보고서를 검토하고 신문을 읽기도 하며 일과를 점검한다. 그나마 금쪽 같은 이 아침 시간도 요즘은 제대로 쓰질 못한다. 1주일에 세 번 가량은 아침 식사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어디에서든 의자에 앉을 때면 김장관은 꼭 저고리 주머니에서 ‘일정표’를 꺼내든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갈 만한 크기로 백지를 잘라 고리로 묶은 그 유명한 ‘김덕룡의 일정표’다. 하루 일정은 물론 1개월 단위나, 길게는 연간 주요 일정이 적혀 있다. 손때가 반질반질하고 군데군데 접히기도 한 이 일정표에는 전화 통화를 할 사람의 이름과 시간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정을 짜는 비서들도 모르는 ‘비밀일정’역시 이 일정표 안에 다 들어 있다.

 이런 사람에게 일요일이 따로 있을 턱이 없다. 일요일이나 휴일에도 아침 6시30분이면 집을 나와 행사장으로 향한다. 지구당이 주최하는 걷기대회.배드민턴대회.등산대회 등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김장관의 성실한 지역구 관리는 소문이 나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 동료 의원들의 평이다. 더구나 서초을지구당과 같은 건물을 쓰는 서초문화원은 지난 총선에서 괴력을 발휘해 민자당 후보들이 서울에서 추풍낙엽일 때에도 과거 야당이 아닌 ‘민자당 김덕룡 후보’를 여의도에 재진출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새 정치1번지로 일컬어지는 서초구에서 백발의 김장관이 여성 유권자들의 인기를 독점하다시피 하는 배경이 서초문화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문화원의 주부 대상 강좌는 성황을 이룬다.

 김장관의 승용차에는 카폰이 두 대 설치되어 있다. 다른 국무위원과 마찬가지로 한 대는 일반용이고, 나머지 한 대는 도청방지 장치가 되어 있는 청와대 직통 무선전화기다. 다른 국무위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김장관은 언제 어디서든 김영삼 대통령과 통화한다는 점이다. 그는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나 당 3역회의 등 공식 일정을 제외하고는 청와대에 가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럴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하루 평균 20여명, 많을 때는 거의 30여명을 만나는 그는 승용차로 이동할 때도 쉬지 않는다. 서류를 검토하거나 어딘가와 통화하기 위해 수화기를 잡고 있다.

 김장관 비서진이나 주변 인사들이 김장관을 평하는 말 중에 공통된 점 한가지가 있다. “누가 시킨 일이라면 저렇게 부지런하지 못할 것이다. 타고난 사람이다.” 이래서 누구도 김덕룡을 대신할 수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정치인 생활 23년째인 그는 이제 겨우 재선 의원이다. 하지만 재선 의원답지 않게 그의 정치 이력은 최절정에 달해 있다. 공식적인 사무실만도 정부종합청사.민자당.국회본청에 각각 정무장관실이 있고, 의원회관 사무실과 지구당까지 합해 모두 5개다. 정치권이 김장관의 이름 석자를 자꾸 거론하는 것은 사무실 갯수 때문이 아니다. 그의 영향력 때문이다. 김장관측 한 인사는 그를 이렇게 평한다. “지난 20여년간 김장관은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니면서 대인관계와 정치사안을 다루는 방법 등 나름대로 정치권에 적응하는 비결을 체득했다. 이제 그 결과가 하나씩 나오는 중이다.”

 지난 70년 김장관은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김영삼씨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줄곧 순수 혈통의 상도동 인맥이었다. 단 한번도 한눈을 판 적이 없다. 80~88년은 김영삼 총재 비서실장을 지냈고, 83년 5.17 2주년 때 김총재가 단식을 하자 외신기자들에게 이 사실을 발표함으로써 75년(시인 김지하의 오적시 사건)과 79년(YH사건)에 이어 세 번째 구속되기도 했다. 모두 김대통령과의 인연 탓에 빚어진 사건들이었다.

 당초 두 사람의 만남은 김대통령의 ‘손짓’으로 이루어졌다. 67년 7대 총선때 신민당의 김영삼 원내총무는 당시 27세였던 김덕룡씨에게 전북 이리.익산 지역구 공천을 제의했다. 김장관은 경험 부족을 이유로 이 제의를 거절했고, 3년후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떨어져 어려운 처지인 김영삼씨를 제 발로 찾아가 비서를 자청했다. 그후 김장관은 김영삼의 분신이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김대통령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으나 정작 ‘정치인 김덕룡’은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다.

 

구설수에 올라본 적 없는 ‘지퍼’

 그의 별명은 ‘지퍼’다. 아무리 기자들이 들러붙어도 도대체 입을 열지 않는다. 새정부 출범 전까지는 ‘큰일을 위한 지퍼’였다. 큰일이란 물론 김영삼씨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3당 합당에서 대통령선거까지 이른바 상도동 밀사 자격으로 여권 핵심 인사를 만나고 재야와 접촉하는 등 가장 비밀스런 정치활동을 해왔으면서도 말썽의 소지가 될 만한 말은 단 한마디도 공개적으로 발설하지 않았다. 미묘한 정치 사안이 연일 매스컴을 장식할 때에도 그는 구설수에 올라본 적이 없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해 정치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현재도 그는 여전히 ‘지퍼’다. 이제는 김대통령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인 김덕룡의 이름을 찾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주변의 소리가 크면 클수록 그의 입은 더 굳게 다물어진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이 굳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새 정부 출범 전보다 더 잰 걸음걸이를 보이고 있다.

 청와대 비서진 인사의 뚜껑이 열리기 전 그는 비서실장으로 거명되었으나 정무1장관 자리로 낙착되었다. 주변에서는 김장관에게 가장 적합한 자리가 배정되었다고 평했다. 지역구 기반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당.정의 울타리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정무1장관은 수명이 긴 자리가 결코 아니다. 평균 수명이 1년 정도다. 청와대와 당, 청와대와 행정부를 오가며, 청와대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기 십상인 대통령의 귀와 눈이 되는 자리가 정무1장관이다.

 김장관은 여권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제입으로 말하기는 꺼리지만 차세대 정치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자신의 이름이 거명되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제 ‘막후’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리고 전면에 나섰다. 그로서는 제2의 정치 인생을 막 시작한 셈이다. 성실성과 부지런함이 정치인 김덕룡의 장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선이 가늘다’ ‘영원함 참모형이다’라고 약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이런 약점이 지적되는 것은 숨은 참모형을 요구했던 최근의 정치상황에 충실한 결과이며, 전면에 나선 이상 상황이 바뀌리라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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