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렁속 한국경제 서서히 살아난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2006.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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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비관론 엇갈리나 “실업률 외 나쁜 지표 없어”



 요즘 한 신문이 ‘신불황’이라는 제목의 기획 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국내 제조업체의 최고 경영자들은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을 70년대 1.2차 석유파동 때보다 더욱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본다”라고 진단한 이 연재 기사의 부제는 ‘끝없는 경제수렁...현황과 대책’이다. 반면 한 경제신문은 ‘경기 기지개 켜는다’라는 연재 기사를 싣고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경기가 본격적으로 회복된다고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경기는 분명히 꿈틀거리고 있다.

 경제 상황에 대한 평가는 어떤 시간대를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경기가 일시적으로 호전되는 것처럼 보여도 길게 보면 더욱 깊은 침체의 늪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일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꼭 이것 때문에 두 신문의 진단이 엇갈리는 것은 아니다. 두가지 시각은 한국 경제에 대한 전통적인 비관론과 낙관론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출 증가는 성장 잠재력이 이룬 결과

 어떤 시각이 옳은 것일까. 과연 한국 경제는 살아나고 있는 것일까, 침체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일까. 상반된 두 시각은 작년부터 계속돼온 경기 논쟁과 무관하지 앟다. 새 대통령과 경제팀이 들어서고 나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경제 정책을 주도하는 청와대 경제비서실.경제기획원 등 정부의 시각이 업계와 같은 비관론으로 많이 기울었다는 점이다. 업계는 수출경쟁력이 야과된 데다가 내수마저 빠른속도로 진정돼 89년 7월 이후 4년 가까이 경기 침체가 계속됙 있다고 판단해왔다. 유례없이 긴 경기 침체로 그동안 쌓아온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많이 잠식당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경제 1백일 계획을 비롯한 각종 경기부양책이 잇따랐다.

 그러나 한국개발연구원(KDI)과 대학에 근무하는 많은 경제학자들은 그동안 지나치게 과열됐던 내수가 진정됨으로써 ‘거품’이 해소돼 진정한 성장 잠재력이 배양됐다고 믿는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경제가 서서히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경기부양책을 쓰면 오히려 부작용만 클 것이라는 시각이다 (<시사저널> 제181호 참조). 그동안 경제성장을 주도해온 수출만 보면 이들의 기대가 어느 정도 맞아들고 있다. 수출이 작년 하반기의 침체에서 벗어나 빠르게 회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1/4분기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5% 늘어났다. 수입은 4.5% 감소했다(도표1 참조). 높은 수출 증가율은 지역별로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시장, 상품별로는 자동차 철강 반도체 석유화학제품 수출 증가에서 비롯한 것이다. 엔화 강세도 한국 수출품과 경쟁하는 일부 일본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데 한몫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국개발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주요 수출 품목이 바뀌고 수출시장이 넓어지는 것은 한국경제의 역동적인 장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최근의 수출 회복세야말로 그동안 축적한 성장 잠재력이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수출이 성장을 주도하는 시기가 곧 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수출이 계속 늘어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수희 연구위원은 “최근의 수출회복세는 수출시장 다변화와 엔화 강세에 따른 것인 만큼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라고 내다봤다. 선진국 시장에서 한국의 수출품은 여전히 밀려나고 있으며, 일본으로부터 수입이 늘어나면 엔화 강세의 긍정적 효과도 곧 상쇄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내수로 눈을 돌리면 상황은 모호해진다. 투자나 소비가 나아지고 있다는 지표상의 근거는 아직 없기 때문이다. 90년에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던 설비 투자와 건설 투자는 지난해에 각각 정체되거나 약간 줄어든 상태다(도표 2 참조). 작년 하반기부터 금리가 하향 안정됐는데도 기업의 투자가 급격히 늘지 않는 데에는 심리적 요인이 많이 작용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용환 이사대우는 “기업인들은 새 정부의 경제희생 의지에 기대를 걸고 있긴 하나, 지난 몇 년간 진이 바질 대로 다 빠진 상태”라고 말했다. 기업인들의 투자의욕이 쉽사리 되살아나기는 힘들 것이라는 주장이다.

 반면 아직도 많은 경제학자가 업계의 주장이 약간 과장된 것이라고 느낀다. 한국개발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지난해 투자가 낮아졌다고 걱정하지만, 작년 이전에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투자가 낮아진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작년에는 정부가 총수요관리를 위해 일부러 자본재와 기계류 수입에 재한을 가했고, 여러 산업의 대형 투자도 완료됐다. 또 대통령선거로 인한 정권교체기여서 모든 것이 확실치 않던 때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정권 교체가 끝나 불확실성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이 투자심리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마침 건축허가 면적은 지난해 4/4분기에 80% 이상 는 데 이어 올해 1/4분기에도 10%이상 늘어났다. 건축허가면적은 흔히 건설투자의 선행지표로 여겨지며, 건설투자는 내수를 주도한다.

 소비는 일반적으로 투자보다 긴 시차를 두고 경기를 반영한다. 경제가 호황일 경우 2-3년이 지난 뒤 민간소비가 크게 증가하고, 불황이면 1-2년 후에 반영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86-88년 호황으로 89-91년 민간소비 증가율이 10%를 웃돈 것이 좋은 예다. 소비는 수출.투자와 같은 성장 요인과는 달리 경제가 활력을 되찾은 한참 뒤에야 급격히 증가하는 것이다.

 1백일 계획이 앞으로 물가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남아 있지만, 일단 물가는 5공화국 당시 수준에 상당히 근접한 상태다(도표 3 참조). 최근 경기 침체의 주범으로 지목됐던 총수요관리를 통한 안정화 정책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안정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야 한다고 믿는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물가안정이야말로 진정한 국제경쟁력의 원천이라고 여긴다. “물가가 선진국 수준으로 안정돼야만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시 경제지표 가운데 작년에 비해 나빠진 것이 있다면 실업률이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도표 4 참조). 작년과 달리 올해 들어 실업률은 크게 늘어나고 있다. 고용 수준 증감을 나타내는 고용증가율은 이미 작년 하반기부터 급격히 둔화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고학력자나 여성 뿐만 아니라 생산직 근로자의 실업문제도 대두될 수 있다. 지난해 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해 인력난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됐기 때문이다.

 일부 경제학자는 최근 경제 정책을 합리화하려는 정부의 논리가 허술하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금리.임금과 같은 생산요소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1백일 계획에 대해서 오로지 기업의 투자의욕을 북돋우기 위한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투자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호전될 낌새가 있었다면, 자율화에 역행하는 1백일 계획은 부작용만 낳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 경제학자느 “정부가 앞으로 실업률이 높아질 우려가 있어 어쩔 수 없이 1백일 계획을 추진해야 한다는 식으로 홍보를 했으면 납득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초과수요가 진정된 후 연착률(soft landing)하는 상황에서는 생산요소의 값이 진정돼야만 실업사태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실업문제가 경기활성화에 의외의 ‘복병’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국노동연구원 어수# 연구위원은 “현재의 실업 수준이 매우 심각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앞으로 실업 문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가능성은 큰 편이다”라고 말했다.

 거시 경제지표들을 볼 때 경제가 급격히 되살아나고 있다는 징조는 없다. 그러나 경기가 지표에 반영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과 일부 성장 요인이 활력을 되찾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경제는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해 4/4분기를 밑바닥으로 해서 서서히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떤 지표가 좋아졌나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나빠졌나를 확인하는 식으로 발상을 전환함으로써 확인해볼 수도 있다. 한국개발연구원 거시경제팀 좌승선 연구위원은 “실업률만 빼면 지난해 4/4분기와 비교해 나빠진 경제지표는 하나도 없다”라고 말했다. 과열 성장의 진통을 앓아온 한국 경제에 실업문제는 오히려 ‘사소한 문제’로 그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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