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혼’의 연금술사 임권택
  • 송 준 기자 ()
  • 승인 2006.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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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상 수상 <서편제>로 ‘거장’면모 거듭 과시...인간애 담은 개성적 영상 추구

 
서편제는 전라남도 광주 나주 보성 강진 해남 등지에서 성행한 판소리 유파가운데 하나이다. 활달하고 우렁찬 동편제에 견주어 서편제는 유연하고 구성진 곡조를 애절하게 늘여뽑아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이 한의 가락을 영상에 옮긴 영화 <서편제>가 지난 4월10일 제31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감독상.촬영상.녹음상.신인남우상.신인여우상 등 6개 부문을 휩쓸었다. 연출.연기.영상.소리 전부문 ‘최고’임을 인정받은 셈이다.

 <서편제>를 본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 영화계가 90년 만네 내놓은 진품”이라고 평했다. 영화평론가 이효인씨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문화, 그리고 풍경을 가장 한국적인 영상으로 담아 낸 민족 영화의 본보기”라고 표현했다.

 한편의 영화를 놓고 비평계가 이렇게 떠들썩한 이유는 그만큼 우리에게 만족할 만한 영화가 가물었기 때문이다. <서편제>는 이 가뭄을 해갈시켜 주었다. 이 작품은 동시에 한국 영화가 국제 경쟁력을 갖추는 한가지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부끄러운’ 습작기 거쳐 토속세계 몰두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그려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이다. 문제는 작품의 완성도이다. <서편제>에 이르러 우리는 비로소 토속적 소재를 ‘세계적 수준’으로 그려냈다.

 임권택 감독은 이미 지난 80년대 초반부터 한국풍광의 영화적 가능성을 주목해왔다. 지난 81년 <만다라>가 배를린영화제 예선을 통과한 이래 그에게 쏟아진 국제적 호평이 그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다. <씨받이>(87년.베니스영화제) <아다다>(88년.몬트리올) <아제아제 바라아제>(89년.모스크바, 이상 모두 여우주연상 수상)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시사저널> 제157호 참조). 지난 90년 6-7월에는 독일 뮌헨영화제에서 ‘임권택 영화주간’이 열리기도 했다.

 그의 영화는 ‘예술’을 지향한다. 토속적 문화와 정서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점에서 임감독은 국제적으로 ‘거장’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거장 임권택의 초기 영화는, 예술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었다.

 “순전히 밥을 위해서 닥치는 대로영화를 찍었다”고 임감독은 당시를 회상한다. 그가 처음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56년. 전쟁 뒤의 각박한 사회에서, 열아홉살 임권택에게 영화는 단지 생활의 방편일 따름이었다. 이렇다할 오락거리가 없을 때여서 영화는 유력한 오락.문화 매체였다. 질보다 양이 요구됐고, 그는 61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뒤 “주저함도 부끄러움도 없이 3류 영화들을 마구 찍었다”고 했다.

 엄청난 다작의 시절이었다. 64년 한 해에만 6편을, 69-71년에는 무려 21편을 만들어냈다. 그는 초기 영화 50편을 단연코 ‘습작’이었다고 규정한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러나 ‘임권택 영화’의 골격을 다지는 구실을 했다.

 51번째 작품 <잡초>(73년)에서부터 임감독의 영화관은 바뀌기 시작했다. 단지 수단이던 카메라에 목적을 부여한 것이다. “나의 언어, 나의 세계를 갖고 싶었다. 영혼이 깃든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다시 혼란이 찾아왔다.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영화에 영혼이 깃들까. 이후 10년은 모색의 세월이었다. 그러다가 만든 것이 <만다라>이다. 이때부터 그는 토속적 소재에 골몰한다. 토속 세계로 귀의하면서 그는 방황을 마쳤다. 결국 93번째 작품 <서편제>는 그의 오랜 방황과 각성, 그리고 갈구가 얻어낸 피안인 셈이다.

 38년 영화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임감독은 철저한 장인 정신을 체득했다. 그는 영화 바깥의 변수를 거부한다. 우선 인기 배우를 쓰지 않는다. 관객이 영상을 대할 때 일체의 선입견이나 환상을 갖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는 또 “하루에 1백20번씩 판단하고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영화의 예술성.작품성을 절대 기준으로 삼는다.

 

“내 영화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존중”

 그는 임권택 영화가 다른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도 거부한다. 그래서 다른 감독의 작품을 별로 보지 않는다. 지난 한 해 임감독이 본 영화는 <퐁네프의 연인들> 한편뿐이었다. 그는 모든 시간을 자기만의 영상 세계를 꾸미는 데 바친다.

 그에게 취미와 여가는 곧 영화이다. 가정과 영화 말고는 아는 것이 없다. 그는 틈 나는대로 헌팅(촬영 장소를 물색하는 일)을 나선다. <서편제>가 보여주는 깔끔한 영상미는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다. 해남 고창 법성포 등 남도의 각 지역과 서해의 여러 섬에서부터 강원도 속초에 이르는 이 땅의 경치가 <서편제>의 화면에 펼쳐진다.

 이세룡씨(영화 평론가)는 임권택의 영상미학에 대해 “한국인만이 찍을 수 있고 한국인만이 읽을 수 있는, 육화된 이 땅의 모습을 서럽도록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고 표현했다. 임감독은 빼어난 경치를 찍지만 카메라 기교를 배격한다. 그의 카메라는 대개 고정된 위치에서 그저 보여줄 뿐이다.

 “단순히 아름답게 찍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의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에 사람이 등장하지 않아도, 경치속에서 우리 숨결이 들어가야 한다. 카메라가 산천을 바춰도 내가 찍은 것은 사람의 모습, 삶의 모습이다.”

 그가 영상을 통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 존중’이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영화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격동기일수록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구원해줄 것처럼 떠들지만 좌.우 모두 희생을 강요할 뿐이었다. 내 영화의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사람에 대한 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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