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부자 소리 듣지 말자
  • 글·박완서(작가) 사진·이은주(사진작가) ()
  • 승인 2006.05.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티오피아의 재난은 발전한 나라들의 과소비에 대한 하늘의 경종


 에티오피아에서 돌아오던 날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데 촘촘하게 깔아 놓은 보도블록 사이의 흙이랄 것도 없는 옹색한 틈 사이로 풀이 파릇파릇 비집고 올라오는 걸 보고는 불현 듯 내 몸 깊숙한 곳에서 찬탄과 환희가 복받치는 걸 느꼈었다. 내가 발 디디고 사는 우리 강토의 땅힘에 무조건 감격하고 경배드리고 싶츤 게 에티오피아에 다녀온 후의 나의 가장 큰 심적 변화이다.

 이번 유니세프 에티오피아 방문단의 목적은 유니세프가 그 나라에서 지원하고 있는 소말리아 난민수용소와, 가뭄이 계속되고 있는 지역 내의 식수.위생.보건 사업 등을 시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국내에 돌아와 그쪽의 어려운 사정을 널리 알려 유니세프의 지원사업에 광범위하고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글이나 말로 내가 보고 느낀것만큼을 표현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우리는 흔히 몹시 마른 사람을 피골이 상접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로 피골이 상접한 사람은 그 말에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 그중에도 순전히 못먹어서 피골이 상접해 죽어가는 어린이를 수도 없이 보았을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확실한 건 분노밖에 없었고, 저 아이들이 저렇게 죽어가는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라는 탄식이 고작이었다.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그 아이들이 제 죄나 부모의 죄 탓으로 그리 되었다고는 말 못하리라.

 소말리아에서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에티오피아로 넘어오는 것은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가뭄으로 인한 기근과 내전을 피해서라고 하는데, 에티오피아에도 그들을 구제할 만한 국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국력이라 한 것은 지표 상에 나타난 인구밀도.국민소득.국민총생산 따위가 아니라 그 나라 자연이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힘, 즉 땅힘을 말한다. 난민수용소 말고도 우리가 방문한 지역은 거의 다 몇 년째 계속되는 가뭄에 식수조차 곤란한 때에서 더했겠지만, 소말리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해서 진행되고 있는 지구의 사막화 현상이 바로 이런 거라는 걸 눈앞에 보는 듯해 섬뜩한 공포감을 느꼈다.

 우리나라 자연의 황폐화 조짐은 차량과 공장의 공해물질 방출, 화학비료 남용 등 주로 근대 석유 문명에 의한 오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서 본 외제차 말고는 수도에서 티그레이주의 주도인 미켈레까지 가는 동안도, 미켈레에서 시바의 여왕의 유적지가 있는 악슘까지 가는 동안도 석유 문명의 찌꺼기라고는 공장의 굴뚝은커녕 비닐 봉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풍경은 물론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주거양식이 모세 시대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근대 문명의 영향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국토 40% 숲이었던 나라, 잡초조차 귀해

 그러나 원시적이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60년대에 나온 백과사전만 봐도 국토의 40%가 숲이라고 나와 있는 나라가 지금은 숲은커녕 녹색 자체가 귀했다. 경작지가 비어 있는 건 수확기가 끝났다니까 이해가 됐지만 우리 상식으로는 도처에 잡초라도 무성해야 마땅할 온난 청량한 기후에 그 모양이었다. 녹색이 움트지 않는 황폐한 땅은 거기 몸 붙이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얼마나 곤곤하고 피폐할까를 절로 짐작하게 했고 여행자의 심신까지도 쉬 지치고 고달프게 했다.

 그렇다면 옛날 사전에 나와 있던 숲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차가 구비구비 헐떡이며 오르는 고산지대에도 마을은 있었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나무를 해서 지거나, 나귀나 낙타에 실은 나무꾼이 있었다. 메켄레에서는 죽을 끓이기 위해 호텔 주방을 빌린 적이 있는데 그 고장 제일의 호텔인데도 장작불로 요리하고 있었다. 산에 아직 드문드문 남아 있는 나무도 먼지를 뒤집어써서인지 아미 말라죽은 것인지 황토 먼지 빛깔로 서 있어서 보는 사람에게 갈증만 일으켰다.

 우리가 땔감으로 산의 나무를 남벌할 적만 해도 겨울에 난방이 필요없는 열대지방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없는 사람에겐 여름 살기가 훨씬 편하다는 상식도 그런 데서 비롯됐었다. 그러나 조리용 땔감만 필요한 나라에서도 그 모양이었다. 자연을 함부로 오염시키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가꾸지 않고 착취만 한 결과 또한 가공할 일이라는 걸 이 나라는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왜 고대 문명이 치산치수가 있고 나서 비로소 비롯됐나를 알 것 같았다. 치산치수가 없었다는 것은 바로 정치가 없었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나라는 30년 동안이나 내전을 치렀고 이제 겨우 민주적인 과도 정부가 들어서서 각종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산을 푸르게 하는 정책이 제발 너무 늦은 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우리끼리 과연 이 나라에 희망이 있을까 비관적인 얘기까지 나눈 적이 있는 것도 과연 산을 다시 푸르게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과도 통하는 얘기였다. 그러나 유니세프에서 지원하는 식수 개발 사업이 메마른 땅에서 맑은 물을 펌프질해 올려서 물 한통을 긷기 위해 하루 왕복 예닐곱 시간을 소비하던 주민들에게 안전한 식수를 공급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 물로 펌프장 주변에 푸른 채마밭이 생긴걸 보니, 도움에 회의처럼 야비한 구실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선 중에 물 적선이 제일이라지 않나, 목타는 사람이 물을 달라는데 계산부터 하는 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실제로 가진 것보다 더 부자인 걸로 국외에 소문이 났고, 남 보기에 그렇게 행동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함부로 돈 자랑을 하던 부자가 도움을 청하는 이웃한테 인색하게 굴 때 더러운 부자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비록 얼마 안되는 부이지만 우리 부의 도덕성 회복을 위해서도 그들을 돕는 데 주저해서는 안될 것 같다.

 그 땅에 왜 그렇게 비가 안오는 것일까. 그 땅의 기후 변화가 아마존 열대림의 감소와는 과연 무관하며, 열대림 훼손과 우리의 과소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우리보다 한발 앞서 사막화되고 있을 뿐인 것이나 아닌지. 그들의 재난이 그들의 죄가 아니라면, 발전한 나라들의 개발일변도 정책과 과소비에 대한 하늘의 경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게 요즈음의 내 심정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