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 대물린 전통의 맛
  • 전북 순창·허광준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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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고추장·장아찌, 우편·전화로도 '매콤새콤' 판매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버스 터미널과 군청 사이에 곧게 뻗은 길 3백여m를 이 고장 사람들은 '고추장 골목'이라 부른다. 이 골목 양켠으로 순창의 명물 고추장과 장아찌만을 파는 전문점 열대여섯개가 큼지막한 간판을 내걸고 몰려있다. 어느 가게나 안에 보이는 것은 한아름정도 되는 항아리와 자그마한 도자기이며, 손님을 맞는 주인은 하나같이 나이 지긋한 아낙네들이다. 항아리들에는 한 두해 묵은 고추장과 여러 가지 장아찌들이 그득히 담겨 있다.

  고추장 골목에서 멀지 않은 '순창고추장보존협의회'사무실 뒤꼍에서는 끝물에 접어든 고추장 담그기가 한창이다. 막 쪄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찹쌀 경단에 메줏가루와 고춧가루, 간장, 엿기름물을 섞어 버무리는 손길이 바쁘다. 가끔 소금을 조금씩 넣어 간을 맞추는데, 이 재료들을 얼마나 넣는가에 따라 고추장 맛이 달라진다. 기본적인 배합은 찹찰 40%, 고춧가루 20%, 메줏가루 12%, 재래식간장 10%, 물14%, 소금 4% 정도이다. 고추장은 고무통과 항아리에 담아 저장하는데, 항아리 하나하나마다 군청 위생계 직원이 담근 날짜를 흰 물감으로 적어둔다.

  이 고추장에 여러 채소를 버무려 저장하면 장아찌가 된다. 장아찌는 따로 담그는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고 채소가 많이 나오는 때가 제 철이다. 순창 고추장과 장아찌의 생산·유통을 관리하는 순창군 농산물유통계 허영주 계장은 "고추장 맛이 워낙 뛰어나 아무 채소나 고추장에 버무려두기만 하면 맛깔스런 장아찌가 된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순창에서 생산하는 장아찌는 더덕도라지 마늘 오이 감 무 두릅 고들빼기 깻잎 참외 등 10여 가지가 넘는다. 순창에서 많이 나는 감으로 만든 독특한 장아찌는 고추장 맛과 감의 단맛이 어울려 알근달근한맛을 낸다. 도라지 더덕 등은 알싸한 맛을 자랑하며, 서근서근하게 씹히는 마늘장아찌 맛도 일품이다.

  무·도라지·더덕 장아찌는 재료를 1년이상 간장에 절여 두었다가 고추장으로 버무려 맛을 낸다. 처음 고추장은 재료에서 나오는 물기로 묽어지기 때문에 따라 버리는 수밖에 없다. 서너차례 새 고추장을 섞어 넣어야 제대로 맛이 든 장아찌가 된다. 마늘 장아찌는 간장 대신 소금과 식초로 간을 맞춰 1~2년절여 두어야 독한 맛이 빠진다. 최종 단계에서 고추장에 버무려 장아찌를 만드는데,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값싼 무나 마늘이 장아찌가 되면 비싼 상품이다.

  순창군에서는 이 지역에서 생산하는 고추장과 장아찌의 품질을 유지하고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순창 고추장 보존 및 육성에 관한규칙'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지난 90년 제정된 이 규칙은 순창 고추장·장아찌를 만들어 팔 수 있는 사람들의 자격 요건, 품질 검사, 유통 경로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전통고추장 제조 기능자로 인정받으려면 35세 이상으로 순창 읍내에서 10년 이상 거주해야하며, 고추장과 장아찌를 만든 경험을 주민들이 인정하고 추천해야 한다. 현재 순창에서는 이러한 자격을 갖추어 기능 보유자로 지정된 사람이 25명이다. 그들만이 '순창'이라는 상표를 붙인 고추장과 장아찌를 생산·판매할 수 있다. 기능 보유자들은 모두 여성으로 대부분 이 동네 토박이거나 순창으로 시집온 아낙네들이다. 기능 보유자 중의 한 사람인 문정희씨(66)는 "순창 고추장의 맛은 부엌에서 고부간에 혹은 모녀간에 손끝으로 이어져 왔다. 나도 시집와서 시어머니로부터 고추장 만드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같은 재료라도 다른 데서는 제 맛 안나

  순창고추장보존협의회 김행자 회장(58)은"이곳에서 나는 메주나 고추를 가지고 다른지역에서 고추장을 담그면 이상하게 순창고추장 맛이 나지 않는다"라며 그 맛의 신비함을 강조했다. 주민들은 그 이유가 뛰어난 물맛과 회문산 강천산 등 주변 입지 조건이 만드는 온화한날씨 덕이라고 말한다. 순창 고추장의 독특한 맛이 물과 온도 때문이라는 것은 숙명여대 식품영양학과 김상순 명예교수가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즉 메주균(황국균)이 메주를 가장 맛있게 발효시키는 온도는 섭씨 30~35도쯤인데 이는 다른 지역과 달리 메주를 여름에 띄우는 순창의 관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고추장과 장아찌에서 느낄 수 있는 감칠맛은 글루타민산 계통의 아미노산이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작년 한 해 동안 순창에서는 고추장과 장아찌를 모두 4백24t이나 생산해 전국 각처에 팔았다. 현재 순창 고추장과 장아찌는 농협이나 우체국을 통해 우편으로 판매하고 있으며, 보존협의회(0674-53-2710)로 전화해 주문할 수도 있다. 가끔씩 대도시 백화점에서 특별 판매를 하기도 한다. 값은 1㎏ 단위로 고추장이 1만원이고 더덕장아찌 1만8천원, 도라지·마늘 장아찌 1만2천원, 나머지 장아찌는 모두 1만원으로 정해져 있다. 식욕을 잃기 쉬운 봄철 매콤새콤한 전통의 맛으로 입맛을 돋우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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