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가 평양 오면 모든 것 다 풀린다”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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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육성 발언’으로 본 북·미 관계 전망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이쪽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인식을 확인하는 것 또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한반도 문제에서는 북한, 그 중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생각을 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가 북한 외교의 실질적 총사령탑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왔으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지난 4월 말 탕자쉬안 중국 국무위원의 방북은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4월27일께, 후진타오 주석의 특사 자격으로 비밀리에 방북한 그가, 김정일 위원장에게  ‘6자회담 재개가 북한에 이익이라며 조기 복귀를 설득’하자, 김위원장은 ‘금융 제재를 받고 있는 마카오 은행(BDA)의 북한 계좌에 대한 동결이 먼저 해제되어야 한다’며 양보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그동안 북한 외교부를 통해 공식화한   ‘선(先) 동결 해제 후(後) 6자회담 복귀’라는 주장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육성’이 그대로 소개된 것이다. 또한 이를 계기로 북한의 대외정책, 특히 대미 정책 분야에서 그가 어느 정도의 깊이로 개입하는지, 또 그동안의 북·미 관계에 대해 어떻게 인식해왔고,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과 작용을 해왔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높아졌다.

북한 사정에 밝은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르면, 북한 외교에서 김위원장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세심할 정도로 구체적이다. 지난 1994년 북미 제네바 회담이 좋은 예다. 당시 북측 협상 대표인 강석주  부상은 협상 진행의 세부적 사항까지 모두 보고했고, 일일이 지침을 받아 협상에 임했다고 한다. 심지어 ‘갈루치는 이런 성격이니 이렇게 말하라’ 또는 ‘가지고 간 대응 방안 중 이 방안을 택하라’는 식으로 지시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세심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같은 지시는 대체로 현지 시각으로 새벽 2, 3시에 이뤄진다. 따라서 협상 대표단에는 반드시 김위원장의 지시를 전문적으로 하달받는 고위급 인사가 동행하게 마련이다.

 
김위원장이 대미 협상팀에게 하달했다는 다음과 같은 지시는 이미 불문율로서, 100% 이행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즉 “내가 자는 동안, 쉬는 동안을 가리지 말고 상황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미 협상의 경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까지 거의 모두 지침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면 틀림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생각을 확인하라’ ; 김위원장이 탕자쉬안 국무위원에게 했다는 발언은 여러모로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냥 불쑥 나온 것이 아니라 지난해 11월 이후 최근까지 진행된 북·미 교섭사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대한 금융제재 이후, 본격적인 북·미 접촉을 위해 김계관 외교부 부상이 베이징 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11월5일 힐 차관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출발하기 이틀 전, 김정일 위원장이 그를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돈(BDA에 동결된)에 대해서는 관계없으니, 집착하지 마라. 가서 미국이 정말 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만 명확하게 확인하라. 어차피 부시가 있는 동안은 일이 안 될 수도 있으니,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입장만 확인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지시 내용을 보면 김위원장이 현안인 방코델타의 금융제재에 대해서는 오히려 매우 대범한 생각을 견지한 반면, 오히려 미국의 의사 확인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미국의 어떤 뜻을 알고 싶어했을까. 당연히 이는 ‘미국이 북한과 관계 개선을 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의사의 유무’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주 명확하다는 점이다.

김위원장이 설정한 기준, 즉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 관계를 개선할 의사가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 설정한 그 기준이 바로 라이스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이다. 즉 부시 대통령이 궁극적으로 라이스 장관을 평양에 보내, 자신과 북·미 현안을 타결할 용의가 있는지를 확인하라고 한 것이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김위원장이 이처럼 라이스 장관의 방북을 미국의 정책 판단 기준으로 설정한 것은 2005년 4월 중순께였다. 당시 북한이 중국을 통해 라이스 장관의 방북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얘기가 보도된 바 있는데, 실은 중국을 통해서뿐 아니라 뉴욕 채널을 통해서도 직접 미국측에 같은 내용을 타진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이처럼 라이스 장관 방북을 중요한 준거점으로 보는 것은,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반영한 것일 뿐 아니라,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즉 클린턴 행정부 시절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북·미 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던 것처럼, 최소한 국무장관급의 평양 방문이 있어야 관계 개선의 의지가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미 관계에 대한 김위원장의 이같은 확고한 입장으로  인해 지난해 힐 차관보 경우 본의 아니게 상처를 받기도 했다. 힐 차관보는 방북에 의욕을 보였고 또 북측에 여러 루트로 타진도 했으나 이런 기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김위원장이 생각하는 북·미 관계의 본격 해법은 최소한 미국 국무장관급의 방문을 통한 최고위급 협상을 통해서라는 것이고, 이를 위한 북·미 양자 채널을 통해서라는 점에서  일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월 뉴욕 접촉의 내막: 김위원장의 지시를 받은 김계관 부상이 힐을 만나 대화한 결과, 양자 접촉에 대해 분위기가 매우 긍정적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김위원장에게 “(부시 행정부도)하려는 의지는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그 다음 지시가 떨어졌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타진해볼) 방안을 수립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수립된 방안이 바로 지난 3월7일 리근 국장이 뉴욕 접촉에서 미국측에 제시한 ‘북·미간 비상설 협의체’ 안이었다. 즉 북한과 미국 간에 비상설로 협의체를 만들어 현안인 금융제재(위폐 문제)뿐 아니라 관계 개선 문제 등을 협의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의 배경에는 그동안의 여건상 즉각적인 양자 채널 복귀에는 서로 부담이 있으니, 과도적 단계를 거쳐 보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미국측의 답변은 뜻밖에도 ‘노(No)’였다. 그 대신 6자회담에 복귀하면 그 안에서 양자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공식적으로는 성과가 없었으나 비공식적으로는 당시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양측 외교창구 간의 접촉에서 양자 채널에 대한 깊숙한 공감이 이루어져 서로 만족했다는 후문이 들려올 정도였다. 따라서 김위원장에 대한 보고도 이런 분위기를 감안해 이루어졌다. 리근이 복귀 후  “비상설 협의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재무성의 완강한 반대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무성은 일단 6자회담에 복귀하고 그 안에서 양자대화를 하자는 것입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김위원장의 태도가 매우 단호했다고 한다. “그것은 미국이 하자는 게 아니다. 틀림없이 저쪽 내부의 문제가 더 크다. 우리가 굳이 밀려갈 필요가 없다”라고 자르듯이 지침을 내렸다. 이때 이미 김위원장의 입장은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4월 도쿄회의의 전후 : 그러나 실무진에서는 미련이 남았던 것 같다. 4월7일의 도쿄회의(동북아시아협력대화·NEACD)를 준비하면서 김계관 외교부 부상은 두 가지 안을 마련했다. 하나는 3월 뉴욕 접촉의 우호적 분위기 대로 미국측이 최소한 BDA에 대한 금융제재를 완화하는 등의 성의 있는 조처를 취할 경우 6자회담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로 임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반대의 경우로, 이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맞선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안 중 북측 실무진은 실제로는  첫 번째 안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미국측이 뭔가 내놓을 것이고, 또 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니 정반대 상황이었다. 김위원장의 예상대로 힐 차관보는 빈손으로 나타났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거부하는 형국이었다고 북측은 보고 있다.

‘선 복귀 후 협의’에 부정적인 이유 : 미국측이 제시한 대로 ‘먼저 6자회담에 복귀하고 그 다음에 양자 채널을 여는 것’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김위원장의 태도를 보면 이에 대해 매우 단호한 태도다. 그것은 왜일까.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근본적으로는 부시 대통령에 대한 김 위원장의 불신을 들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이 2004년11월 재선에 성공한 후 김위원장을 만났던 북한의 한 원로는 국내의 대북 사업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장군님은 부시가 있는 동안은 사실상 미국과는 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신다. 모든 것이 없다는 전제 하에 정책이 꾸려질 것이다”는 것이었다. 그의 전언은 김위원장의 대미 인식의 근저를 대표적으로 드러낸 말로, 지난해 11월 김계관 부상에게 한 지시 내용도 이런 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본적인 인식의 문제 외에 불신을 더욱 깊게 한 정황이 그 뒤 발생했다. 라이스 장관을 축으로 한 부시 2기 정부 출범 후 미국의 대북 정책에 변화가 엿보였다. 구체적으로 주한대사를 역임한 힐 차관보를 축으로 대화파가 포진하면서 베이징 등을 무대로 북한과 이면 대화가 시작됐다. 특히 2005년 6월17일 정동영-김정일 면담으로 남북대화가 본격화하면서 북·미간 이면 접촉 역시 매우 활발해졌다.    이 과정에서 알려지지 않은 여러 가지 비사가 있다. 당시 미국 국무부의 미션을 받은 특별 전문가 팀이  6월 중순에서 7월10일께까지 비밀리에 평양에 체류했다. 이들이 미션은 바로 북한측과 평양-워싱턴 간 연락사무소 개설 문제에 대한 사전 실무 협의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협의 결과가 올해 3월 국무부에 보고서로 제출되기도 했다. 미국 대북 관계의 이면에서 연락사무소 개설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주장은 이런 움직임에 근거한 것이었다.

당시의 북·미 접촉에 대해 한 대북 전문가는 “당시의 협의 수준이라면 당장에라도 라이스 장관이 평양에 가 현안을 일괄타결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있게 이루어졌다”고 지적했다. 베이징에 나와 있는 북한 외교관들 역시 이점에서는 같은 인식이다. “왜 안 오는가. 오기만 하면 우리가 핵까지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왜 김정일 위원장이 ‘선 복귀 후 양자 대화’라는 미국측 제안에 강경한가. 방코델타 아시아은행에 대한 미국의 금융제재가 발동된 것은 바로 북·미 양측이 이면 접촉에서 서로의 관계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을 한창 주고받을 무렵이었다. 때마침 9·19 공동성명 타결로 한껏 부풀어 오를 무렵, 난데없이 ‘새로울 것도 없는’ 위폐 문제로 난장판이 되었다. 한쪽에서는 잘해보자고 한껏 분위기를 잡고, 다른 쪽에서는 칼을 갈고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금융제재가 아니라 ‘도발’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 대북 전문가에 따르면, 지난 4월 도쿄회의에 참석 당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북한은 당시 미국이 다른 한쪽에서 탈북자 문제 등을 이슈화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고 한다. 등에 칼을 쥐고 있는 상대와 웃으며 대화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불신이 깊으면 상식도 통하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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