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ㆍ12, 법의 심판 받는가
  • 정희상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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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측 장성·원로 장군단·법조계 “진상 규명 · 처벌 추진하겠다”



 

 새정부가 출범한 지 열흘이 채 못된 지난 3월초, 군 원로 1백20명이 이색적인 수기를 발간했다는 소식이 일반에 알려졌다. 《노병들의 증언》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이 수기는 지난 49년 5월23일 육사 8기로 임관했던 생존 장교들의 회고록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에 12ㆍ12사태와 관련해 처음으로 군 원로들의 평가와 해결 방향을 담았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수기에서 8기생 가운데 한명인 이재전씨(10ㆍ26 당시 청와대 경호실 차장)는 “8기생들의 집약된 견해를 밝힌다”고 전제한 뒤 12ㆍ12사태에 대해 이렇게 규정했다.

 “전두환 소장이 주축이 되어 기존의 사조직 하나회와 보안사 요원들의 주동으로 군통 수권자인 당시 대통령의 사전 허락 없이 전ㆍ후방 부대를 불법 동원해 직속 상관인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을 납치ㆍ구금함으로써 야기된 하극상의 쿠데타를 ‘12ㆍ12사태’라 부른다.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불법 행위를 합리화하고 보신하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어 광주사태와 같은 엄청난 참사를 빚었고, 국민으로부터 사랑받아야 할 군대를 저주의 대상이 되게 했다.”

 그는 이어 12ㆍ12에는 8기생의 책임도 적지 않았음을 자성하면서, 당시 거사를 위한 경복궁 회동에 참여했던 8기생 3성 장군들(유학성 차규헌 황영시)의 반성을 촉구했다.

 수기에 나타난 12ㆍ12사태를 보는 8기생들의 관점에는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군부 주변에서, 그것도 원로 장군단이 12ㆍ12사태를 이렇게 규정한 점은 놀라운 변화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 지난 13년간 사실상 객관적 논의가 금기시돼온 12ㆍ12사태를 군쪽에서 정면으로 언급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노병들의 증언》은 후배 현역 장교들에게도 조용한 파문을 던졌다. 원로 장군단으로부터 ‘군의 명예 회복’ 방향을 암시하는 나침반을 선사받은 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12·12사태와 진상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열쇠를 쥔 진압군측 장성들도 때를 같이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12ㆍ12의 진상 규명을 위해 당시 주역들을 모두 법정에 세워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제 12ㆍ12사태는 역사적 재조명을 피할 수 없게된 셈이다.

 물론 12·12사태에 대한 군 내부의 시각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날 밤 거사에 가담했던 상당수의 영관 장교가 아직도 군 수뇌부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고, 사태의 온상이 된 하나회도 여전히 군내부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동안 12ㆍ12사태의 주역들을 통해 일방적으로 일반에 알려진 ‘그날 밤 상황’과 ‘무용담’도 12ㆍ12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날 밤 상황에 대한 새로운 증언과 자료는 12ㆍ12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시사저널》은 이에 따라 역사적 재평가의 도마 위에 오르기 시작한 12ㆍ12사태의 진상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새롭게 발굴한 자료와 장태완 장군의 수기 원본을 전재한다(12~19쪽 수기·작전일지 참조).

 진상 규명 공세 앞에 선 12ㆍ12사태 주역들이 현재 어떤 입장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역사적·법적 논쟁에 휘말리기를 꺼리는 것만을 분명하다. 그들은 지난 13년 간의 집권시기에도 12ㆍ12사태의 명분을 선전하기는커녕 공식적인 논의조차 철저히 금기로 해왔다. 이 점은 5ㆍ16쿠데타 주도 세력과 12ㆍ12사태 주도 세력의 다른 점이기도 하다.

 물론 12ㆍ12사태 주역들은 그날의 상황이 ‘하극상’이나 ‘반란’이라는 시선에 대해서는 단호한 거부 의사를 보인다. 이점은 12ㆍ12사태 핵심 인물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89년 12월30일 국회 5공특위 합동청문회장에서 진술한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해 사건에 대한 수사권은 대통령의 사전 결재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수부장의 포괄적인 권한이었다. 따라서 하극상이라는 용어는 당치도 않다. 정승화 총장이 비록 용의를 벗었다고 해도 당시로서는 용의가 현저했고, 수사한 결과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용의자였다. 일단 용의자로 지목되면 지위 고하를 물을 수 없다. 상관이니 하위자니 하는 관계는 없어지고 용의자가 수사 책임자 관계만 남는다.”

 12ㆍ12사태 주역들은 그날 밤 전방의 9사단(사단장 노태우 소장)병력을 빼낸 것도 ‘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9사단 병력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를 받게 돼 있어 노태우 사단장 단독으로 휴전선 병력을 빼내 경복궁에 진주시킨 것은 명백한 불법 행위이다. 이는 12ㆍ12 당시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이 군 수뇌부에 불법 병력 동원 부분을 강력히 항의한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사실 12ㆍ12사태가 법리적ㆍ역사적 논쟁에 부쳐질 경우 사태의 주역들은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그들이 정권을 잡아온 지난 13년 동안 12ㆍ12사태에 대해 거론하는 것을 봉쇄한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12ㆍ12 당시 진압군 진영에 섰던 관계자들은 진상 규명의 공세를 늦추지 않을 기세다. 이들은 내년 12월12일이면 이 문제가 법적인 시효를 넘긴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초조한 기색마저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당시 진압군 진영에 섰던 장성들은 물론 원로 장군단ㆍ퇴역 장교단·법조계 등이 연계해 대대적인 ‘12ㆍ12 진상규명’ 운동을 벌일 계획도 세우고 있다.

 12ㆍ12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추진하는 세력은 명분을 앞세운다. 그날의 주역들은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반란으로 건전한 국방 사상이 왜곡됐으며 민군 갈등, 군 내부의 전투력 약화, 부정부패 만연 등 수많은 폐해를 남겼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란죄ㆍ이적죄 적용 가능” 주장

 이들은 앞으로 헌정 중단을 가져오는 군사 행동을 예방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12ㆍ12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 주역들을 일벌백계 원칙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12ㆍ12 반대편에 섰던 쪽에서는 그날의 주역들을 법정에 세우겠다는 목표로 법률 전문가들과 검토 작업을 진행중이다.

 이들이 12ㆍ12주역들에게 적용된다고 보는 주된 법조항은 형법과 군형법에 몰려 있다. 우선 형법 제1장 91조의 국헌문란죄는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대통령·계엄사령관 등)을 강압에 의해 전복 또는 그 기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12·12 주역들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납치한 사실과, 결재를 거절하는 최대통령을 10여시간씩 감금해 결재를 강요한 사실은 명백히 이 죄목에 해당한다” 는 주장이다. 또한 그날 밤 정식 지휘 계통을 무시한 채 불법으로 병력을 동원해 성공시킨 거사 자체에 대해서는 형법 제87조의 내란죄 및 반국가 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상의 내란죄ㆍ이적죄 조항이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반란 진압 진영이 사법부에 고소ㆍ고발장을 접수시키게 되면 건국 이래 가장 큰 ‘소송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실로 13년 만에 군인들의 손에 의해 12·12사태가 역사적 재조명 작업의 도마에 오름으로써 이를 둘러싼 논쟁에서 정부도 국민도 방관자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문민 정치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12·12사태로부터 얻을 교훈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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