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헌법2개 만들고 있다
  • 변창섭 기자 모스크바ㆍ김종일(자유기고가) ()
  • 승인 2006.05.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옐친, 제헌의회 구성·수정안 준비 … 의회 “독자 헌법 마련” 공표

 전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지난 4월25일 실시된 러시아 국민투표 결과는 옐친 대통령의 앞날이 여전히 가시밭길임을 예고한다.

 대통령 신임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의 잠정집계 결과 투표자 3천9백만명 중 58%가 옐친 대통령을 신임했다. 그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52.9%가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옐친 대통령이 추진하는 개혁정책의 걸림돌이 돼온 인민대표대회를 해산하고 새로 총선을 실시하기 위한 힘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따라서 이번 국민투표는 옐친 대통령에게 ‘반쪽 승리’를 안겨주었을 뿐이며 보수파가 지배하는 의회와의 충돌은 계속될 것 같다.

 투표 결과가 나온 지 이틀 만에 벌써 보혁세력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옐친 대통령은 국민투표에서 얻은 신임을 바탕으로 대통령 자문기구를 소집해 헌법 개정과 시장경제화 개혁을 가소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을 이 기구에 맡겼다.

 

옐친, 공화국 대표에 수정안 제출 요청

 옐친 대통령은 4월29일 각 지역별 공화국 대표들에게 5월20일까지 헌법 수정안을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그는 이들 대표에게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대표를 2명씩 선출해 줄 것도 요청했다. 이에 맞서 의회도 5월20일까지 독자적인 새 헌법 초안을 만들어 제출하겠다고 발표했다. 의회는 6월10일까지 각 지역 및 공화국 대표들에게 의견을 밝힐 기회를 준 뒤 10월11일 최종안을 공표하겠다는 것이다.

 옐친 대통령은 기존의 경제개혁에서 앞으로는 정치개혁에 역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바에 주재하는 한 서방 외교관은 “이번 투표에서 옐친을 나름대로 자기의 경제정책에 대한 지지를 확인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정치 위기를 해소하려 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외교관은 “옐친 대통령이 멀지않아 직할 통치를 선언하거나 아니면 조기 총선을 발표한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했다.

 옐친 대통령은 헌법 제정권이 없다. 그 때문에 세르게이 샤흐라이 부총리를 포함한 옐친의 법률 보좌관들은 헌법을 새로 제정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인민대표대회를 무시한 채 특별위원회를 통해 헌법을 제정하는 것은 ‘독재적’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고 뒤탈도 심각하리라는 지적이다. 그렇다고 옐친 대통령은 3월에 선언했다가 1주일 만에 거둬들인 직할 통치를 다시 선언할 수도 없다. 만일 옐친 대통령이 새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또 다시 직할 통치를 선언할 경우 의회가 즉각 그의 탄핵에 나설 것이다. 현행 헌법상 대통령이 헌법을 정지시키면 대통령직을 박탈당한다. 이 경우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정치적 핵폭탄’으로까지 불리는 새 헌법안은 미국식의 강력한 대통령제를 특징으로 한다. 새 헌법안의 주요 내용을 보면, 대통령은 의회 해산권과 중앙 은행 총재 임명권을 갖는다. 1천33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된 현재의 단원제 인민대표대회 대신 소규모 상설 의회인 하원과 상원인 ‘연방위원회’가 신설된다. 상설 의회 의원은 국민의 직접투표로 선출한다. 현행 부통령제는 폐지하기로 돼 있다.

 

옐친과 의회, 극적 타협 가능성

 옐친 대통령이 새 헌법에 강한 집념을 보이는 것은, 지금처럼 보수파가 지배하는 의회가 건재하는 한 개혁 작업을 제대로 추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90년 옛 소련 헌법에 따라 선출된 현재의 의원들은 95년까지 임기가 보장돼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을 제거하자면 헌법을 새로 고쳐 총선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헌법학자인 발레리 바리셰비치는 “현행 헌법은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분명히 구분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통령중심제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새 헌법 제정이 꼭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선거가 실시되면 낙선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보수파 의원들이 옐친 대통령의 새 헌법제정 움직임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는 없다. 반옐친 진영의 핵심 인물이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은, 옐친 대통령이 의회에 대한 강경 조처를 취할 경우에 대비해 탄핵안 발의 등 대응책을 강구중이다.

 새 헌법안 채택을 둘러싼 옐친 대통령과 의회와의 갈등은 서로 한발씩 양보함으로써 타협점을 찾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모스크바에 주재하는 한 일본 특파원은 “의회측도 옐친 진영과 정면 승부를 하기보다는 부분적인 헌법 개정에 동의함으로써 타협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의회측의 ‘부분적 동의’가 의회의 현 지위를 보전하는 것이라면 옐친측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옐친측이 헌법 개정을 추구하는 근본 목적은 다름 아닌 현 보수파 의원들을 거세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번 투표 결과 가장 타격을 입은 사람은 옐친 이후를 노려온 루츠코이 부통령과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이다.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현 상황에서 하스불라토프 의장이 퇴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번 투표 결과 수세에 몰린 반옐친 진영에 그를 대신할 뚜렷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하스불라토프 의장이 일선에서 물러나는 사태가 벌어지면 보수파의 세르게이 바부린 의원이 나설 가능성도 있다. 외부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바부린 의원은 의회측과 수구파 공산세력 간의 매개역을 맡아온 주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옐친 대통령은 당분간 의회와의 정면 충돌은 피하면서 단계적으로 중앙 정부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조처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선 돈을 마구 찍어 통화 인플레 ‘주범’이 된 중앙 은행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것이다. 또 의회내 지지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정당으 로 조직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당장 그가 할 일은 보혁 세력의 다툼에 신물이 난 국민에게 나라의 장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다. 모스크바 대학의 아나톨리 파블로비치 교수는, 옐친 대통령이 무엇보다 국민에게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데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렇지 못할 경우 국민들이 정치무기력 증상에 빠질지 모른다”라고 경고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