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민주국가의 지도자 像
  • (본지 칼럼니스트ㆍ고려대 교수) ()
  • 승인 1989.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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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어느 연못의 개구리들이 神에게 자기들을 다스릴 왕을 보내달라고 청을 했다. 神은 나무토막을 던져주었으나 개구리들은 순하고 점잖은 왕이 마음에 차지 않아 더 무서운 왕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神이 이번에는 황새를 왕으로 내려보냈다. 그런데 새 왕이 도착하여 눈앞에 보이는 개구리를 잡아먹기 시작하자 개구리나라는 울음판이 되고 神을 원망하는 소리로 가득찼다. 이것은 물론 이솝寓話의 한토막이다.

 사람들이 자기들을 이끌어줄 지도자를 갖기 원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 지도자가 약하고 순하면 얕보고 강하고 무서우면 원망한다.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萬人이 萬人에 대해 적대관계를 갖는 인간사회에서는 暴君이라도 지배자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까지 했다. 특히 권위주의 체제에 익숙한 사람들은 暴君이건 賢君이건 강력한 지도자나 지배자가 없을 때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느낌을 갖는다. 專制정치에서 강력한 지배자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권력행사에 있어서 별로 제한을 바지 않으므로 더 오래, 더 크게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스탈린 같은 폭군도 고르바초프 같은 현군도 다 전제정치에서 가능한 강력한 지배자의 像이다.

 

壓制者는 배격되어야 한다.

 민주국가는 지배자(ruler)가 아닌 지도자(leader)를 갖는다. 그는 시간적인 한계와 제도적 견제, 그리고 여론의 속박 아래 제한된 힘과 영향력을 절제 있게  행사해야 한다. 그렇다고 민주국가에서 강력한 지도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지도자는 전쟁이나 공황 같은 위기상황에서 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歐美에서는 1930년대와 1940년대의 경제적ㆍ정치적 위기가 루스벨트, 처칠, 드골 같은 ‘위대한’(이러한 표현에 異意를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만)지도자들을 만들어냈다. <뉴욕타임스>의 아서 슐즈버거가 1950년대 이후의 서양사회를 ‘평범한 사람의 시대’(Age of Mediocrity)라고 정의했던 것은 그것이 위기의 시기가 못되어 위대한 지도자가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민주체제에서 세계대전과 같은 위기상황이 아니더라도, 위대하지는 못하나마 강력한 지도자다 출현할 수도 있다. ‘鐵의 女人’(iron lady)으로 불리는 영국의 대처 총리가 그 좋은 例이다. 그는 전례 없는 10년에 가까운 집권을 통해 영국을 경제적 침체로부터 건져냈고 아르헨티나와 전쟁을 수행하여 국제적 위신을 회복시켰다. 대처 총리가 이러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1980년대 영국의 경제적ㆍ국제적 사정이 좀 급박했기 때문이나 대처 총리 본인의 지도자적 자질이 높았기 때문이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 장면,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 이렇게 모두 여섯명의 정부지도자를 가져왔다. 그런데 이들의 성향으로 보아 공교롭게도 세사람은 硬性, 나머지 세사람은 軟性의 지도자라고 특징지울 수 있고 이러한 경성과 연성의 지도자가 번갈아 가면서 우리에게 군림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우연한 일이라고도 하겠으나 어떻게 보면 이치가 그럴 수도 있다. 국민은 강한 지도자에게 시달린 다음에는 염증이 나서 약한 지도자를 선호한다. 그러나 약한 지도자 다음에는 강한 지도자가 따를 확률이 크다. 그 이유는 앞의 이솝이야기에서도 보았듯이 역시 국민이 좀더 강한 지도자를 원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약한 지도자로부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사람은 强性의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왜 이렇게 硬性 아니면 軟性 양극단의 지도자 사이를 왕복해야 되느냐는 것이다. 좀 과장해서 황새도 나무토막도 아닌. 壓制者도 평범한 사람도 아닌, 즉 민주적이면서도 영도력을 가진 지도자로 일관할 수는 없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왜 압제자를 배격해야 되는가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승만정권의 독재, 유신의 암흑, 5共의 비리는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갈구하게 했다. 그렇다고 우리는 지도자 그 자체를 배격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우리는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위기 속에 살고 있다.

 이 나라의 지도자는 민주, 민족, 평등의 3대혁명을 동시에 그러나 평화적으로 이행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우리의 국가적, 사회적 과제는 강압에 의해서도, 또 자유방임에 의해서도 수행될 수가 없다. 이 나라는 아직도 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양대 과제가 암아 있을 뿐 아니라 국민가의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복지와 정의 그리고 안전을 도모하며 국토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효과적인 지도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와 같은 사회가 요구하는 민주적 지도자란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가?

 

지도자는 ‘중대결정’을 전가하지 말아야

 첫째, 그는 국가와 사회가 앞으로 나갈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주는 사람이다. 그는 나라의 주요문제들의 본질을 파악하고 미래의 과제들을 예상하며 그 해결과 대비의 방법을 강구하여 국민에게 알려주고 국민을 설득시키는 사람이다. 둘째, 그는 사회와 국민의 화합과 단결에 앞장서는 사람이다. 그는 지역주의와 편파성을 배격하고 각축하는 이해관계를 평화적으로 조정, 해결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상승된 차원의 문제로 정의하여 사회전체의 이익에 부합되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따르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갖고 국민을 이끄는 일도 따르는 일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특히 그는 크고 어려운 일, 중요한 결정을 회피하거나 남에게 전가하지 않고 자기 책임으로 맡는 사람이다. 이것이 국민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길이기도 하다.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은 재임시 그의 책상 앞에 표어를 하나 달아 놓았다. 미주와 비민주를 막론하고 모든 지도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그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책임전가는 여기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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