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特惠보따리’가 좌우한 재계판도
  • 송일(外大교수 · 경영학) ()
  • 승인 1989.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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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재벌 浮沈, 부실기업 정리 · 2세들의 경영능력 등이 큰 영향 끼쳐

지난달 17일 산업은행 13층 회의실. 2년이 넘게 공개입찰을 미뤄온 거대기업 한국중공업이 드디어 삼성 · 현대 양대 재벌 중 어느 쪽에 넘겨질지 판가름나는 자리였다. 그러나 이날 韓重의 새 주인은 결정되지 못했다. 삼성측이 불참 유찰됐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현대측은 ‘치밀한 재뿌리기 작전’이라고 삼성측을 몰아세웠고 재계에서는 “인수조건을 완화하기 위한 도박”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공기업으로 좀더 두고 보자는 속셈”이었다는 설 등 해석이 분분했다.

韓重이 재입찰되어 특정 재벌그룹의 차지가 되면 韓重의 덩어리가 워낙 커 90년대 재계판도 변화에 결정적 변소가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韓重은 양대재벌외에도 雙龍, 鮮京, 曉星, 統一 등 굵직한 재벌들이 눈독을 들인 기업이었다. 비록 누적적자가 3천4백억원에 달해 납입자본금 4천2백10억원이 거의 잠식된 부실기업이지만 발전설비 능력에서 세계최대 규모이며 플랜트 및 기계제작 능력에서도 세계적으로 상위그룹에 속하는 거대기업이기 때문이다. 어느 재벌이든 韓重을 인수한다면 중화학공업의 경쟁에서 결정적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만양 삼성이 인수할 경우 중화학 부문의 편중률은 25%, 현대로 가면 36%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따라서 韓重의 새 주인 결정은 누가 인수하건 간에 재계판도를 하루아침에 바꿔놓을 사건이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順風과 逆風이 것갈린 격동 10년

이제 얼마 있으면 89년도 과거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숨가쁘게 달려온 80년대, 우리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에서 두자리수의 성장까지 순풍과 역풍이 휘몰아친 격동의 10년을 경험했다.

80년대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더욱 심화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노사분규가 폭발했던 시기였다.

80년대의 재계는 재벌의 영토구축이 확고부동해지면서 ‘재벌공화국’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60~70년대에 자본을 축적한 재벌들은 80년대 후반기 호황으로 덩치를 크게 불렸고 외형사아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80년대 재계판도를 크게 변화시킨 요인으로는 韓重의 예에서 알 수 잇듯이 부실기업정리가 큰 몫을 차지한다. 2세 경영인의 대거 등장으로 촉발된 경영다각화, ‘3低’로 인한 업종간의 浮沈, 노사분규도 기업의 성패를 가름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국제그룹의 해체를 제외하면 80년대에 재계 10위권내의 대기업 순위는 큰 변화가 없었다. 특히 5위권 이내를 보면 85년의 경우 삼성, 럭키금성, 현대, 대우, 선경의 순위에서 작년엔 럭키금성과 현대의 자리가 바뀌었을 뿐 요지부동이었다. 다만 85년 랭킹 16위였던 기아그룹이 작년에 9위로 껑충 뛰어오른 것이 눈에 띈다. 반면 10위권 밖은 변화무쌍했다고 표현될 수 있을 정도. 85년 19위였던 동국제강그룹이 15위, 삼미그룹이 25위에서 17위, 한일합섬그룹이 23위에서 20위로 도약했다. 또 극동건설, 동양그룹, 한보그룹, 고려합섬그룹, 풍산금속, 극동정유, 일화 등이 30대 재벌에 편입된 반면 범양상선, 대한선주, 국제그룹 등 정리기업과 태광산업 그룹 등은 밀려났다.

全經聯의 한 관계자는 “80년대의 재계판도는 무엇보다 부실기업을 인수, 이에 뒤따른 특혜자금으로 부상한 그룹들이 재계 랭킹이 뛰어오르는 기회를 결과적으로 잡게 됐다”고 밝힌다. 50년대의 간판기업이었던 화신그룹과 60~70년대 수출의 견인차였던 동명목재그룹이 부실기업으로 문을 닫았고 재계 랭킹 7위였던 국제그룹의 공중분해는 충격적이었다. 6차례 단행된 부실기업정리는 명성그룹, 경남기업 등 굵직한 기업들을 재계에서 무참히 거세시켰고 재계판도를 결정적으로 바꿔놓았다. 특히 85년의 국제그룹 해체는 재계의 판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86년 9월에 있었던 제4차 부실기업정리 과정에서 국제상사 무역부문 등 5개 사를 인수한 한일합섬그룹을 비롯 동국제강그룹, 극동건설그룹 등 국제의 잔해 인수에 참여한 그룹들은 재계 20위권으로 부상하는 행운을 안았다. 심지어 동국제강은 2백40억원을 들여 그것의 10배나 값이 나가는 연합철강을 인수했다.

또 정아그룹(舊명성) 6개사를 인수한 한국화약그룹도 여기서 빼놓을 수 없다. 한국화약은 현금장사인 한양유통마저 인수, 단번에 10위권으로 뛰어올랐다. 87년 4월에 있었던 18개 해외건설 및 해운업계를 대상으로 한 정리작업도 재계판도에 변화를 가져왔다. 정우그룹 5개사는 벽산그룹으로 넘어갔고 ‘受注의 명수’로 알려진 대림산업은 2차 정리때 부동산재벌 삼호를 인수한데 이어 고려개발도 끌어갔다. 6개월간의 신경전 끝에 대한선주는 한진그룹에 인수되는 비운을 맞았다.

대우그룹은 경남기업을 은행빚 4천7백억원을 무이자에 15년거치, 15년 분할상환이라는 파격적 조건으로 인수했으며 종자돈 천억원도 지원받기로 했었다. 이 돈은 차후 기업정상화보다 자동차부문 투자에 쓰여질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물론 이들 재벌들이 전적으로 부실기업 인수특혜로 승승장구를 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대가로 주어진 자금이 큰 보탬이 되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는게 재계의 일반적 평가이다. 86년 5월부터 대한중기와 풍만제지를 산업합리화 기업으로 지정하면서 시작된 부실기업저일는 지난해 2월 6차정리때까지 70여개 업체들이 정리돼 재계판도변화에 엄청나게 영향을 끼쳤으나 그 후유증으로 우리 경제는 두고두고 몸살을 앓아야 했다.

 

정경유착 의혹 불러일으킨 부실기업정리

우선 6조원 가까운 은행대출금의 원리금 상환이 최고 30년까지 유예됐으며 1조원 상당의 은행대출금은 아예 받지 않는 조건이어서 너무 파격적이라는 논란이 있었다. 여기다 부실기업 인수업체엔 부채상환 밑천의 명목으로 이른바 종자돈이라는 것이 5천억원이나 지급됐는데 이는 명백한 특혜성 자금이었다. 이 상상을 뛰어넘는 돈거래는 모두 9조2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인수업체엔 돈이 노다지로 굴러들어오는 셈이 되었다. 따라서 정리할 필요는 인정되더라도 갖가지 금융 · 세제상 특혜가 주어지는 이 정리과정이 비밀로 붙여져 정경유착의 의혹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정리대상 업체를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데다 인수대상기업 선정도 결국 ‘이쁜 놈’ 위주로 골랐다는 비난의 여지를 남긴 것이다. 80년대는 이같은 부실기업정리로 인해 경제정책비리라는 부정적 문제를 남겼으며 이 진상은 밝혀져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지적이다.

한편 80년대는 창업 1세대가 물러나고 2세 경영인들의 사업수완이 돋보인 시기이도 했다. 이른바 ‘4K’라는 金顯哲(삼미), 金昇淵(한국화약), 金錫元(쌍용), 金重源(한일)회장과 동아그룹의 崔元碩회장이 대표적인 2세 경영인으로 꼽힌다. 재벌2세는 아니지만 기아산업의 金善弘사장은 ‘한국의 리 아이아코카’라고 불릴 정도로 탁월한 경영수완을 인정받고 있다.

또 80년대는 경제정책의 안전지대나 열외지역, 대기업 · 중소기업을 막론하고 살아남기 위해 경영다각화 등으로 변신을 꾀했던 시대로 기록될 만하다. 안으로는 정치및 경제민주화 바람과 이에 뒤따른 노사분규를 막기 위해 그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으며 밖으로는 원화절상, 통상마찰 등 자유화의 물결에 휩싸인 가운데 입지확보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 경제에 큰 희망을 불어넣었던 ‘3低’효과가 3년도 못돼 반전되면서 종합무역상사를 중심으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다. 몸집이 너무 커 멸종의 길을 걸었던 공룡신세를 면하기 위해 감량경영과 체질강화를 서두르는 한편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반도체, 정보통신, 산업전자, 항공, 석유화학 업종에 돈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각 재벌그룹들은 몇년 사이에 국내외 컨설팅회사들에 엄청난 용역비를 지불하고 그룹의 체질개선을 위한 묘책을 경쟁적으로 짜내고 있다.

“독과점으로 앉아서 돈 벌던 시대에서 개방화 · 민주화 시대로 급변하면서 재벌간의 경쟁은 이제 성패를 건 싸움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정경유착 · 자금동원 능력에만 의존하던 시대는 지났다고 할까요. 기술력, 정보력, 고부가가치로 눈을 돌려야 할 때입니다. 21세기는 이를 확보한 재벌들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한국종합금융의 吳浩根사장의 지적이다.

그룹내의 주력기업의 변모도 눈에 띈다. 이는 그룹사의 경영다각화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삼성의 경우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한 시대를 이끌었던 회사들을 제치고 삼성전자, 삼성석유화학, 삼성항공 등으로 주력사가 옮겨지고 있다. 걸설과 중공업으로 발판을 굳힌 현대그룹도 전자, 백화점, 증권 등으로 세력확장을 꾀하고 있으며, 럭키금성그룹도 호남정유, 럭키소재, 럭키석유화학, 럭키유화, (주)럭키 등 5개사가 참여해 대규모 유화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유화산업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삼성 종합화학이 충남 서산 大山지구 유화콤비나트 건설에 1조원을 쏟아부은 것도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과 맥락을 같이한다. 또 기존 주력산업으로부터의 탈피를 선언한 한국화약의 ‘?화약’ 전략, 정보통신 · 자동차 등에 투자 ‘?쇳물’을 꾀하고 있는 포항제철그룹, 진로그룹의 ‘?주류’, 해태그룹의 ‘?식품’ 등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6 · 29 민주화 선언’후 촉발된 민주노조의 결성과 노사분규는 88년에도 계속됐고 재계판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재계의 관측통들은 삼성, 선경, 쌍용 등 노사분규 격량을 우회해간 기업들은 승승장구한 반면 상대적으로 현대, 대우, 럭키금성 등은 몸살을 앓은 재벌로 통한다. 특히 노사분규의 피해를 많이 본 현대그룹은 87년 랭킹 1위에 올랐다가 삼성에 다시 그 자리를 빼앗겼다.

 

한국중공업 향방도 큰 변수

가까운 장래에 재계판도를 뒤바꿀만한 변수는 단연 한국중공업의 향방이다. 조선공사를 한진그룹이 가져간 데 이어 공개입찰에 나온 韓重은 세력확장의 ‘핵무기’로 평가될 만큼 덩치가 크다.

우리에게는 ‘격동과 급변의 시기’였던 80년대. 특히 재계로서는 영토확장을 위한 몸부림이 유달리 거셌던 시기였지만 다가올 90년대도 재계의 전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재벌그룹들의 浮沈은 스포츠 경기의 순위다툼처럼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니다. 재벌들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커졌고 이들의 성쇠는 우리에게 직 · 간접으로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10대 재벌그룹의 매출액은 85년의 56조원에서 지난해에는 90조원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국민총생산에 대한 비중도 71.4%에서 73.2%로 높아졌다. 물론 매출액과 부가가치로 계산되는 국민총생산을 단순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없지 않으나 재벌그룹들이 한국경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몸집이 엄청나게 비대해졌음은 분명하다.

90년대에도 이런 사정이 크게 변화되리라고 전망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육중한 재벌들의 움직임에 부대끼며 살아야 할 서민들로서는 재계의 물량적 판도 변화 보다는 사회적 책임과 기업윤리의 제고 등 그 질적 변모에 더 큰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기아그룹

위기탈출 성공, 랭킹9위로 성큼

80년대 들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기업집단은 자동차 산업을 주종으로 한 기아그룹이다.

경영상태가 최악이었던 80년대 초반과는 비교할 필요도 없고, 85년도에 매출액 8천4백47억원으로 16위였던 기아그룹은 88년에는 매출액 2조5천73억원으로 대기업 랭킹 9위로 성큼 뛰어올랐다. 획기적인 경영혁신으로 재계의 판도를 변화시킨 대표적인 케이스로 꼽힐 만하다.

기아그룹은 현재 모기업이자 종합자동차제조회사인 기아산업주식회사를 주축으로 아세아자동차, 기아기공, 기아서비스, 대한중기공업, 동우정기, 서해공업, TRW 스티어링, 창원공업, 아주금속 등의 계열사로 이루어져 있다.

기아가 깊은 불황의 늪속에 빠져든 것은 제 2차 오일쇼크 이후 80년과 81년 부로가 2년 사이에 5백80억원의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면서부터였다. 기아산업의 매출액은 79년 1천8백14억원에서 80년 1천5백48억원으로 줄었고 종업원수도 79년 4천6백명에서 80년 4천명, 81년에는 3천7백명으로 줄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의 자동차공업합리화 정책에 따라 동아자동차와의 합병이 강제로 추진되면서 기아는 그 존립기반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기아가 살아남을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창업 2세인 金相汶 당시 회장은 자신이 회사의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땜과 동시에 閔庚重 아세아자동차 사장과 金善弘 기아기공 사장에게 경영전권을 맡긴다.

공채 1기로 입사하여 81년 10월 모기업인 기아산업 사장에 발탁된 金善弘씨는 침몰직전의 회사를 기사회생시키는 경영수완을 발휘하게 된다. 우선 그는 사원들과 함께 ‘회사사수’를 선언하고 정부에 끈질기게 맞서 당국의 기아 · 동아자동차 통합 기도를 좌절시켰다. 그후 그는 ‘봉고신화’를 창조해냄으로써 ‘한국의 아이아코카’로 자신의 명성을 굳힘과 동시에 사장 취임 3년만에 2백34억원의 순이익을 내 기아산업을 국내 상장기업 중 순이익 4위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기아산업은 수익성 1~2위를 다투는 회사로 급성장했고 부채비율도 81년에는 2천5백%가 넘었지만 지금은 2백50%를 조금 넘을 정도로 건실해졌다.

기아산업의 극적인 희생은 전문경영인체제로의 전환과 원가절감운동에 힘입은 바 컸다. 특히 全社的인 원가절감 운동인 RCD-22 작전이 주효했다. RCD-22(Reasonable Cost down의 약어)란 합리적인 방법으로 제품 1대당 22만원의 원가를 절감하자는 것. 이는 경영상태를 개선하려면 판매량을 늘리거나 제품 가격의 인상에만 의존했던 종래의 관행에서 탈피, 생산현장에서 합리적으로 원가를 낮춤으로써 판매량을 늘려나가자는 운동이었다.

RCD-22 작전은 이후 엄청난 효과를 거두었는데 82년 1백10억원, 83년 1백4억원, 84년 1백44억원, 85년 1백26억원의 원가를 절감해 회사를 흑자경영으로 변신시켰을 뿐 아니라 제2 창업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국제그룹

정치적 의혹 남긴 채 ‘공중분해’

80년대 한국재벌 흥망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85년 2월의 국제그룹 해체 조치였다. 당시 국제는 매출액으로 볼 때 재벌 랭킹 7위였다.

제5공화국 정부와 협력관계를 유지해왔던 ‘관제야당’ 민한당을 침몰시키고 야성이 강한 신민당을 제1야당으로 탄생시킨 2 · 12 총선거 이튿날인 13일, 정부는 제일 · 상업 · 조흥 · 서울신탁 등 4개 시중은행이 국제그룹의 자금을 공동관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국제그룹의 주력기업은 그대로 존속시키는 방향에서 경영합리화 방안을 강구할 방침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자금관리에 들어간 지 8일만인 2월21일 국제그룹의 해체를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그룹해체의 이유는 ‘방만한 경영’, ‘과도한 부채비율’, ‘사위들의 족벌경영’ 등이었다. 국제그룹 해체는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과격한 조치였으며 정치보복이 아니냐는 강한 의혹이 뒤따랐다.

국제그룹이 방만한 기업경영으로 재무구조가 악화되어 해체되기 전 1년 이상 심한 자금난에 빠져 좀처럼 헤어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84년 10월말 현재 국제그룹의 금융기관부채는 은행부채 9천억원, 제2금융권 4천억원, 해외차입 2천5백억원, 회사채 1천5백억원 등 모두 1조8천억원에 달했으며, 특히 신종사채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완매체가 1천3백50억원이나 됐다.

국제그룹이 해체되어 인수되는 과정에서의 실사작업은 거래은행과 인수자가 담당했고 주주였던 국제측의 참여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실사작업의 내용뿐만 아니라 인수자 선정과정과 그 기준도 비밀에 붙여져 특혜시비가 그치지 않고 있다.

그룹 주력부문의 거의 전부, 즉 국제상사의 무역 및 신발부문, 서울 용산 국제센터빌딩, 해운데 하얏트 호텔, 제주도 하얏트 호텔, 양산 통도사 골프장 그리고 연합물산이 한일합섬으로 넘어갔다. 또 연합철강은 동국제강으로, 국제상사의 건설부문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로, 원풍산업은 우성건설로, 조광무역은 서우산업으로, 국제제지는 아세아 시멘트로, 동우산업은 대양물산으로, 성창섬유는 화승그룹으로 넘어갔다. 큰 덩어리의 재벌그룹 하나가 졸지에 공중분해돼버린 것이다.

국제그룹과 같은 큰 재벌기업을 부도처리할 경우 한국 기업의 대외신용도, 고용의 파급효과, 금융질서의 혼란 등을 고려하여 거래은행 이상의 선에서 그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금융관행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측에서는 84년 12월27일에 있었던 1차 부도처리가 주거래은행의 자율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칮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국제그룹 회장 梁正模씨는 당시 재무장관 金滿堤씨를 비롯, 全傾煥씨와 그밖의 권력층 인사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경유착에 의해 혜택을 입은 기업이 있고 권력에 밉보여 당한 기업이 있다면 국제그룹은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로 일반의 심증이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재벌의 성장 뒤에는 국민희생 있었다

경제력 편중 심화되면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 기대할 수 없어

자유경쟁원리를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생산방식하에서는 규모경제의 이익을 극대화하여 코스트를 절하하고, 기업다각화 전략을 통해 위험의 분산을 도모하므로, 기업의 집중과 독과점적 시장구조를 나타내는 경향이 크다. 이러한 경제력의 누적되는 집중현상은 소비자잉여의 감소,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 소득과 富의 편재, 시장의 교란, 사회적 후생의 손실, 공공이익의 침해 등 건전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필연적으로 저해하게 된다.

구미 선진국에서의 경제력 집중은 시장메커니즘을 통한 자생적 현상인 데 반해, 우리나라의 경우는 정부의 성장정책적 이니셔티브에 의해 의도적으로 육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발자본주의 국가인 우리나라는 60년대의 빈약한 자본과 허약한 산업구조 상태에서 정부의 강력한 주도하에 산업화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산업구조의 개편방향과 경제발전의 속도까지도 정부의 계획과 강인한 의지에 따라 합목적적으로 조정되었다. 또 정부의 성장의지는 대외지향적 수출주도형의 성장논리로 일관되었다. 그리고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위해 정부가 선정한 성장주도형 산업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불균형 성장정책을 추진했다.

 

수출드라이브 정책으로 재벌형성 부채질

정부는 전략산업을 선정하고 투자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교적 양질의 경영자원을 축적한 선발기업을 우선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결과 자연히 조직력과 자본력에서 중소기업에 비해 월등히 우위에 있는 대기업이 각종 우대조치와 정책적 편애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아울러 정부의 각종 세제금융상의 특혜지원을 통해, 60년대에는 화학 · 제척 · 비료 · 정유 산업이 정착되었고 70년대에는 조선 · 자동차 · 중화학 부문의 발전이 진행되었다. 또한 80년대에 이르러 재벌그룹은 전자 · 반도체 · 항공산업 등의 첨단산업분야로 과감히 진출하여, 우리나라 산업의 고도화에 중핵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재벌그룹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쾌속성장을 통해 포괄적 기업다각화를 단시일안에 이루어 한국경제의 압축된 성취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고속성장 과정에서의 역기능과 인위적 산업개편에 따른 부작용도 컸다. 실적과 외형위주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대기업간의 과당팽창경쟁을 유발시키고 타기업을 무차별적으로 인수 · 흡수 · 합병하는 데 동기를 주어 재벌형성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라한 과정에서 재벌그룹은 중소기업과의 보완적 결속을 형성하지 못하고, 이들을 매수하거나 경쟁기업을 신설해 중소기업의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사회적 긴장과 국민적 위화감을 조성하였다. 특히 기업확장을 가능케 하는 각종 우대조치나 특혜지원이 외형적 실적과 정경유착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재벌의 역기능을 심화시켰다.

재벌은 내실을 외면한 채 정부기준의 형식적 요건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적정경영규모를 월등히 초과하는 무모한 팽창을 시도했으며, 이로 인해 재무구조의 악화, 경영부실 등을 야기하고 엄청난 사회적 차원의 낭비를 초래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낭비와 위험은 으레 정부과 국민이 떠맡아왔다. 또한 독과점 이윤이나 특혜자금, 혹은 계열금융매체를 통해 동원한 자금을 비생산적 부문에 무분별하게 투입함으로써 사회적 불안과 갈등을 더욱 고조시켰다.

경제력 집중의 한 지표로 볼 수 있는 GNP에 대한 매출액 비율을 보면, 88년말 우리나라 30대 기업의 종합매출액이 GNP의 약 80%를 차지하였다. 자동차와 가전제품에서 라면, 초컬릿에 이르기까지 이제 한국 국민은 소수재벌그룹에 의해 장악된 독과점적 시장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

서민이나 중소기업이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어렵기 때문에 ‘하늘에 별붙이기’라고 흔히 말한다. 이러한 금융여건하에서 30대 기업의 여신집중률은 86년 38%, 87년 35%라는 엄청난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의 외형적 통계수치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의 전근대적 경영구조의 문제이다. 자본과경영이 미분리되어 경영권이 재2벌총수 1인의 수중에 있으며, 그 자본도 총수와 그 친족 내지 동족집단이 장악하고 있다. 계열기업도 창업주를 비롯한 가족이 주식을 지배함으로써 명목적 전문경영인이 고용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경제력의 집중은 사회가치의 공정한 배분통로를 차단한다. 즉 소수집단에게로 이익을 집중시켜 계층간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국민의 근로의욕을 떨어뜨린다. 더욱이 각종 특혜조치가 군부독재권력의 정치자금 및 정치야합과 연동적 묵계를 통해 이루어져왔으므로, 재벌에 대한 일반국민의 감정이 좋을 수만은 없다.

 

기업조직은 국민 생존 지탱하는 공공자원

근대경제학은 다원화된 생산양식을 해석하기 위해 토지 · 자본 · 노동의 고전적 3대 생산요소와 병렬적으로 경영과 기술 등의 기업능력을 첨가하고 있다. 이제 기업조직은 사회적 公器로서 국민의 생존을 지탱하는 공공자원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재벌그룹은 엄청난 국민적 희생의 토대위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3공화국에서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자유를 인질로 정부의 감성적 성장논리가 추진되었고, 특권적 투자기회와 성취동기가 소수 기업그룹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근로자는 모든 휴식과 사생활까지도 회사에 반납하고 주야로 땀흘려 일해왔다. 이러한 범국민적 차원의 희생 위에서 성장한 재벌그룹이 앞으로 국민적 기업집단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는 것은 역사의 소명이다.

일본의 기업집단이, 성장의 열매가 철저히 사회후생으로 전환되는 복지메커니즘 속에서 발전하고 있음을 우리는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재벌이 국민적 기업으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우선 경영의 민주적 쇄신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혈족자본의 분산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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