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 소 정상이 합작한 새협력의 그림
  • 발레타(몰타) · 이석열 특파원 ()
  • 승인 1989.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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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회담… 동구민주화 · 비핵 · 군축 등 새로이 다짐

불신과 오해 그리고 오산의 두꺼운 벽을 헐고 평화가 보장되는 새 세상으로 가기 위한 길목의 모든 걸림돌을 걷어치우겠다고 미 · 소 두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지혜를 짜냈다. 이념의 꼭두각시가 아닌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민주적 사회주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며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젠 냉전에 종지부를 찍고 말겠다”는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이 지중해 한복판 외딴 섬 몰타해안에서 만나 ‘확정된 의제 없는 자유로운 토론’이라는 정상회담 치고는 별난 회담을 한 것이다.

이번 몰타회담은 역사상 17번째의 미 · 소 정상회담이 된다. 두 나라 사이엔 아직도 메워야 할 골이 없지 않지만, 두 나라가 긴밀하게 협력하지 않으면 풀릴 수 없는 시급한 세계문제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협조적인 분위기가 매우 고조되었다는 게 이번 회담의 특징이다. 당면한 세계문제란, 핵전쟁의 위협을 제거해야 하는 일, 시시각각 변하는 동구권 상황, 베를린장벽 개방 이후의 독일문제,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장래문제, 지역분쟁 해소, 인권신장과 환경보전, 테러방지 대책 등이다.

첫날부터 시속 1백10㎞의 폭풍우와 6m가 넘는 파고에 밀려 회담장소가 바뀌는 등 다소 어수선한 가운데 군함이 아닌 소련 유람선 막심고리키호에서 열린 역사적인 회담은 3시간의 전체회의에 이어 2시간의 단독회담 등 장장 5시간의 마라톤 회담이 되었다.

 

부시, 소련 경제 지원 약속

첫날 회담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거론된 의제는 역시 동구권문제로 이 의제만 1시간 반을 다뤘다. 동구권 변화에 대해 두 지도자는 이 변화가 지역의 안정을 깨서는 안되고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야 하며 어디까지나 미 · 소 두 나라가 ‘다룰 수 있는’ 변화라야 한다는 데 의견일치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독일문제를 놓고 두 나라는 표면상으로는 원칙적인 의견에 접근한 듯하면서도 방법에 있어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소련이 독일통일의 전제조건으로 독일의 중립화와 서독의 나토로부터의 탈퇴를 암시한 데 대해 미국은 반대의견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역분쟁해소에 대해서는 특히 미국이 중남미에 대한 소련의 군사원조 등을 들어 이를 중지할 것을 요구한 데 대해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이미 무기공급을 중지한 사실을 환기시켰다는 것인데, 이 문제가 회담의 ‘가장 뜨거운 의제’였다는 게 관계자들의 귀띰이다.

회담의 또 하나 중요한 의제였던 군축문제는, 두 나라가 현재 빈과 제네바에서 각각 진행중인 유럽주둔 재래식군비감축협상과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을 더욱 촉진해나갈 것과 이를 위해 내년 2월에 미 · 소외무장관이 다시 모여 큰 줄기를 다듬은 뒤 내년 6월 워싱턴에서 있을 2차 정상회담에서는 조인할 수 있도록 합의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3단계 개편안’, 즉 현재의 군사동맹에서 군사 및 정치동맹체로, 다음에는 순수한 정치기구로 개편해나가도록 제안한 것으로 밝혀졌다.

소련의 국내정치 및 경제문제에 대해서 미국은 소수민족 독립운동이나 경제사정 악화로 ‘어려운 사태’가 벌어졌을 때 소련정부가 무력진압 등 탄압정책을 들고 나오게 될 것인지, 그리하여 제2의 천안문사태로 발전할 위험은 없는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표시했다. 이에 대해 소련측은 평화적인 의사표시와 파괴행위의 한계를 설명하면서 난동으로 유혈사태가 야기되는 경우에는 무력진압도 불사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소련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미국은 가능한 모든 도움을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는데 우선 잭슨-바니크법으로 묶여 있는 소련에 대한 금수품목을 풀어주고 새로운 무역협정 교섭을 벌일 것과 IMF(국제통화기금) 등 국제금융기구에 소련이 가입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기로 약속했다. 미국의 약속은 소련을 상대로 하는 미국 기업인들이 금융기관에서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일본과 유럽 선진국들이 자본과 기술을 자유롭게 소련에 제공할 수 있게 됨으로써 낙후된 소련경제가 숨통을 트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고르바초프가 이번 회담에서 얻은 가장 값진 선물이다.

 

독일문제가 회담의 핵심

이밖에도,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인 한반도와 아시아 안보문제가 거론되지 않았겠는가 하는 분석인데, 이 대목에 관해서는 해외주둔 미군감축문제와 직결되어 있어 공개하지 않은 것 같다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이번 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동구권의 민주화와 독일문제를 거론하면서 민족자결주의원칙을 자주 들먹여 주목을 받았다. 소련의 입장을 고려하여 동구권의 변화를 부채질하거나 또 漁父之利를 얻으려고 잔꾀를 부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한 그는 “동구권의 민주화에 고르바초프가 제동을 거는 일이 없어야 하며 동구 여러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 사람들이 결정할 일이고 따라서 유럽의 장래도 유럽인이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함으로써 “몰타회담은 얄타회담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부시 대통령은 “우방이 깜짝 놀랄 일을 일방적으로 할 생각이 없다”고 자주 말해왔는데 “건설적이고 솔직하며 내용이 있는 회담을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두 지도자들이 공동성명 한줄 없이 회담을 마친 것은 어딘지 석연치 않다는 것이 관측통들의 견해다. 민감한 독일문제로 시간을 많이 보낸 부시 대통령은 회담을 끝내고 브뤼셀로 직행하여 동맹국 지도자들과 만나기에 앞서 서독의 콜 총리를 먼저 따로 만나 이해의 폭을 넓히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아 독일문제가 몰타정상회담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인간성의 승리’로 새시대 태동

보기 드물게 서로 마음을 툭 터놓고 풀린 기분에서 이틀 동안 8시간이 넘게 서로 할 이야기는 다했다는 부시와 고르바초프는 마지막날 합동기자회견에 사이좋게 나란히 나와 앉아 1시간 동안 질문에 대답했다. 부시 대통령은 “미 · 소관계가 새로운 시대에 돌입하여 군사적인 대립이 끝나고 새 협력의 시대를 맞이했다. 소련의 개방 · 개혁정책의 성공을 위해 미국은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고 소련은 시장경제를 향해 발전하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이렇게 두 사람이 나란히 나와 앉아 회견하는 것은 과거에 없었던 일로서 역사적인 일로 볼 수 있다. 이런 일만 보아도 앞으로 모든 것이 다 잘 되리라고 믿는다”고 소감을 말했다.

유럽집단안전보장의 개념이 재정립되는 새로운 시점에서 ‘배멀미 정상회담’이니 ‘고리키 정상회담’이니 별명이 붙여진 몰타정상회담은 몇가지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두나라가 군사적인 대결을 피하고 모든 문제를 정치적 해결을 통해 모색하기로 한 점, 소련의 개혁정책은 미국의 정책이 되었다는 점,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변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평화적 혁명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소련이 정식으로 ‘자본주의클럽’의 회원이 되었다는 점이다.

핵전쟁 위협의 길고 암울한 터널을 지나온 인류는 금세기를 마감하는 길목에서 ‘인간성의 승리’로 빗장이 열린 새시대의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고 있다. 얄타시대를 마감하는 새 몰타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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